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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우표로 보는 오늘 인물과 역사

구름에 달 가듯이 2007. 10. 31. 15:01

6월 15일 (水, 음력 5월 9일) 민방위의 날

 

 

 

 



1994년 - 카터(Jimmy Carter) 전 미국 대통령 북한 방문

 

 

 

1969년 - 프랑스 대통령에 퐁피두(Georges Pompidou) 뽑힘

 

 

 

1947년 - 조선올림픽위원회 발족 - 초대 위원장에 여운형





1942년 -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소설 '이방인' 출판

 20세기 프랑스 소설 가운데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읽힌 작품이라 면 단연 '이방인'이다. 프랑스 문학의 중심지인 파리도 아닌 식민지 알제리에서 문맹인 어머니 밑에서 자란 청년 알베르 카뮈가 그 소설의 작가였다. '이방인'은 1942년 6월 15일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나왔다.

그해 1월 어느날 밤 카뮈는 각혈을 했다. 이미 왼쪽 폐가 결핵으로 손상됐고, 더 이상 그가 좋아하던 수영도 즐기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 그는 침대에 누워서 그가 파리로 보낸 소설 '이방인'을 비롯해 철학적 에세이집 '시지프스의 신화', 희곡 '칼리귤라' 원고에 대한 답신을 기다려야 했다. 그중 '이방인'은 앙드레 말로의 추천을 받아 세상에 나왔다. 그 소설은 출간 즉시 문단의 주목을 받았지만, 당시 전시하에서 용지가 부족한 프랑스 신문들은 그 소설에 대한 서평을 실을 지면이 없었다.

카뮈에겐 '이방인' 초판 한 권만 배달됐다. '이방인'은 부조리의 심연 앞에 선 인간을 그린 실존주의 소설의 대표작이다. '이방인'이 젊은 세대에 준 충격은 컸다. 인간은 설명할 수 없는 삶 앞에 직면했지만, 그 삶과 쾌락을 사랑한다. 죽어야하는 운명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삶을 포기하지 않는 인간. 카뮈의 소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합리성에 절망한 젊은 지식인들에게 새로운 정신적 도덕을 제시했고, 실존주의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1950년대 전후 한국 지식인들은 카뮈를 읽으면서 황폐한 현실의 부조리를 견뎌낼 형이상학적 힘을 얻었다. <인터넷 조선>

 

 

 

1934년 - 히틀러(Hitler)-무솔리니(Mussolini) 첫 회담, 오스트리아 처리 논의

 무솔리니는 1921년 5월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그 해 11월 전투자동맹을 파시스트당으로 개편하여 당수가 되면서 정치적 기반을 구축하였다. 1922년 10월 ‘로마 진군’이라는 쿠데타로 정권을 인수, 정치 ·문화 ·경제를 개혁하여 강력한 독재정권의 기반을 굳혀 나가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1935년 에티오피아침략, 1936∼1939년 에스파냐내란 간섭 등으로 제국주의적 팽창정책을 구체화시켰다. 1939년 5월 독일과 군사동맹을 체결하고 나치스 독일 ·일본과 함께 국제파시즘 진영을 구성하였다.

 

 



1919년 - 영국의 알코크(John Alcock)와 브라운(Arthur Brown),  최초의 대서양 무착륙 비행 성공

 영국 조종사 존 알코크와 아더 브라운이 1919년 6월 15일 대서양 횡단 무착륙 비행에 성공했다. 그들은 개조된 비커스 비미 폭격기로 세인트 존스의 뉴펀들랜드를 출발한 뒤 평균시속 118m.p.h로 3,040킬로미터를 16시간 27분동안 비행해 안개가 낀 아일랜드 카운티 갈웨이의 클리프던에 착륙했다.

이 비행으로 많은 짐을 수송하는 비행기가 안개와 추위라는 어려운 조건에서도 오랫동안 비행할 수 있다는 것이 입증됐다. 이 비행으로 두 조종사는 기사작위와 '데일리 메일'지로부터 상금 1만파운드를 수여받았다. <인터넷 조선>

 

 



1917년 - 제 5 . 6 . 7 . 8 . 9대 대통령 박정희(朴正熙, 1917~1979) 태어남

 경북 선산() 출생. 가난한 농부인 박성빈()과 백남의() 사이에서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3년간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만주의 신경(: )군관학교를 거쳐 1944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8 ·15광복 이전까지 주로 관동군에 배속되어 중위로 복무하였다.

광복 이후 귀국하여 국군 창설에 참여하였으며, 1946년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전신) 제2기로 졸업하고 대위로 임관하였다. 그 후 육군포병학교장, 제5사단장, 제7사단장, 제1군 참모장, 제6관구 사령관,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제2군 부사령관 등을 역임하였다. 1949년 사상 관련사건에 연루되어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무기징역을 언도받았으나 구명운동에 의해 복역은 면제되었다.

1961년 5·16군사정변을 주도하고 7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었으며 1962년 대통령권한대행을 역임, 1963년 육군대장으로 예비역에 편입되었다. 이어 민주공화당 총재에 추대되었고, 그 해 12월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하여 1967년 재선된 후 장기집권을 위하여 1969년 3선개헌을 통과시켰다. 제3공화국 재임동안 "한·일국교정상화"와 "월남파병문제"를 국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행하였다. 1972년 국회 및 정당해산을 발표하고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한 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로써 유신정권인 제4공화국이 출범하였다.

유신시대 초기에는 새마을운동의 전국민적 전개로 농어촌의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였고, 제5차 경제개발계획의 성공적 완성으로 국민들의 절대적 빈곤을 해결하는 데 어느 정도 기여하였다. 그러나 상대적 빈곤의 심화와 장기집권에 따른 부작용, 국민들의 반유신 민주화운동으로 그에 대한 지지도가 약화되자 긴급조치를 발동하여 정권을 유지하려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인 ·지식인 ·학생 ·종교인이 중심이 된 민주화운동과 경제개발에서 소외된 노동자 ·농민의 생존권확보운동은 더욱 드세졌다. 이러한 가운데서 내치()의 어려움을 통일문제로 돌파하고자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을 민족통일의 3대원칙으로 규정한 1972년 7·4남북공동성명과 1973년 6·23선언이라 불리는 "평화통일외교정책"(할슈타인원칙의 폐기)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그 내용의 획기성에도 불구하고 실제 정책면에서는 북한의 비협조와 당시의 국제정세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974년 8월에는 그의 부인 육영수가 북한의 지령을 받은 조총련계 문세광()에게 저격당해 사망하였다. 이러한 정권의 위기는 결국 ‘부마사태()’를 야기시켰으며,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만찬석상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저격으로 급서()하였다.

 

 



1888년 - 멕시코의 포스트모더니즘 시인 로페스 벨라르데(Ramon Lopez Velarde, 1888~1921) 태어남 

 순수한 멕시코의 주제를 프랑스 상징주의 기법으로 다루었다.

그는 법학을 공부한 후, 저널리스트와 공무원으로 근무했다. 첫 시집 〈경건한 피 La sangre devota〉(1916)는 시골 생활의 단조로움 및 관능과 정신 사이의 긴장과, 그의 사촌 후엔산타 호세파 데 로스 리오스에 대한 사랑을 다루었는데, 이 작품에서는 종종 복잡하고 대담한 비유로 가득찬 언어가 사용되었다. 〈고뇌 Zozobra〉(1919)에서는 이전 작품의 주제를 더 강도 깊게 다루었다. 1917년 후엔산타의 죽음으로 상실감과 비애와 시에서 나타나는 심오한 관능성을 이끌어냈다. 시 모음집 〈마음의 소리 El son del corazon〉(1932)는 그가 죽은 뒤에 출판되었다. 그의 시는 비록 당대에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세기의 가장 위대한 멕시코 시인으로 간주되고 있다...

 

 


 

1849년 - 미국의 제11대 대통령 포크(James K. Polk, 1795~1849) 세상 떠남

 미국의 제11대 대통령(재임 1845~1849) 포크는 노스캐롤라이나주() 출생. 테네시주()로 옮겨가서 변호사·주의회 의원·하원의원·하원의장을 거쳐 1844년 대통령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텍사스의 병합, 오리건문제의 해결, 멕시코와의 전쟁에 의한 캘리포니아의 획득 등 많은 일을 하여, 영토확장정책(manifest destiny)의 실천자로 알려져 있다.

 

 



1843년 - 노르웨이의 작곡가 그리그(Edvard Grieg, 1843~1907) 태어남

 베르겐 출생. 스코틀랜드 가계() 출신, 어머니에게서 피아노의 기초를 익힌 뒤 1858년부터 4년간 라이프치히음악원에서 수학하였다. 이때 R.슈만과 J.멘델스존의 영향을 받았으며, 게제 ·노르들라크 등 민족주의적인 작곡가들과 사귀면서 독자적 작풍을 확립하였다. H.입센의 작품을 바탕으로 한 부대음악() 《페르귄트》(1876 초연)와 《피아노협주곡》(1868)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몸에 밴 고전적 형식에서 민족적인 음악을 찾으려고 애쓴 그는 《제3바이올린소나타》(1885∼1887)에서 피아노곡인 《노르웨이의 농민무용》(1902)에 이르는 일련의 작품 속에 민족음악의 선율과 리듬을 많이 도입하였으며, 민족적 색채가 짙은 작품을 다수 만듦으로써 오늘날 노르웨이 음악의 대표적 존재가 되었다.

 

 



1792년 - 오스트레일리아의 탐험가, 측량감독관 미첼(Thomas L. Mitchell, 1792~1885) 태어남

 

 



1542년 - 영국의 해군 사령관 그렌빌(Richard Grenville, 1542~1591) 태어남

 버지니아 식민을 위하여 파견한 함대의 지휘와 잉글랜드 서해안의 방비에 활약이 컸다. 1591년 8월 31일, 아조레스제도로 에스파냐 선박을 습격할 때, 그가 타고 있던 ‘복수호(The Revenge)’가 고립되어 5,000명의 해군을 거느린 15척의 에스파냐 함대와 15시간에 걸친 격전 끝에 중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으며, 며칠 뒤에 죽었다. 이 격전의 상황과 그의 최후는 A.테니슨의 시 《복수호 The Revenge》에 의하여 잘 알려져 있다.

 

 

   Sultan Murad I

1389년 - 세르비아-오스만 제국 간의 코소보 전투

 1389년 6월 15일 세르비아의 코소보폴례(지빠귀들의 들판)에서 세르비아 왕자 라자르의 군대와 오스만 제국의 술탄 무라드 1세(1360-1389 재위)의 투르크 군대 사이에 이른바 '코소보 전투'가 벌어졌다. 무라드는 비잔티움과 슬라브 제국의 내부 불안을 틈타 발칸 반도에서 오스만 제국의 점령지를 넓히려는 목적하에 세르비아를 침범했다. 코소보까지 진격했으나 그곳에서 라자르 군대와 맞붙었다.

전쟁 초기에 세르비아 귀족 밀로슈 오빌리크가 투르크군 진영에 잠입, 무라드를 살해함으로 전세는 세르비아 쪽으로 기우는 듯 했다. 밀로슈는 탈영병으로 위장, 투르크 진영에 잠입한 후 술탄의 막사로 들어가 독묻은 단검으로 무라드 술탄을 찔렀던 것이다. 그러나 무라드의 아들 바예지드는 무라드 사후의 혼란을 수습하고 세르비아군을 포위,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고, 라자르를 체포, 처형했다. 패전한 세르비아는 오스만 제국에 공물을 바치고 술탄 군대에서 군역을 질 것을 약속했다. 세르비아는 비록 패배했지만 코소보폴례의 장렬한 전투는 지금까지도 세르비아인들에게 영웅적인 민족 신화로 살아있다. <인터넷 조선>

 

 



1215년 - 영국 존(John Lackland) 왕, 귀족들의 압력을 받고 대헌장(마그나 카르타)에 서명

 1215년 6월 15일, 무능한 영국의 존 왕이 템스강 남쪽 기슭의 러니미드 초원에서 그와 갈등을 빚던 귀족들의 압력을 못이기고 이른바 대헌장(마그나 카르타)을 승인했다.

이 당시의 대헌장에는 조항을 표시하는 번호가 없었으나, 18세기 이래 63개조로 정리됐다. 오히려 이 당시의 대헌장은 철저하게 귀족에 위한 귀족을 위한 귀족의 문서였을 뿐이다. 이전과 특별히 다른 내용도 없었고 80% 이상을 차지하는 농노와도 관련이 없었다. 단지 전해져 오던 봉건적인 모든 권리를 재확인했을 뿐이다.

귀족들이 져야 할 봉건적 부담의 제한과 교회의 자유, 도시 특권의 확인 등이 이 문서의 내용을 이루고 있다. 자유민들에게도 재판 청구권 등 극히 제한적인 의미만 있을 뿐이다.

흔히 이 당시의 대헌장을 근대 민주주의의 시작으로 보지만, 엄밀하게는 17세기 왕과 의회가 대립할 때 왕의 전제에 대항해 국민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한 최대의 전거로 이용되면서이다. 특히 일반 평의회의 승인없이 군역 대납금이나 공과금을 부과하지 못한다고 규정한 헌장 제12조는 의회의 승인없이는 과세할 수 없다는 주장의 근거로, 자유민은 같은 신분을 가진 사람에 의한 재판이나 국법에 의하지 않고서는 체포-구금할 수 없다고 규정한 제39조는 보통법 재판소에서의 재판을 요구하는 근거로 이용됐다. <인터넷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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