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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륙사(大陸史)의 연장, 발해

구름에 달 가듯이 2010. 6. 13. 11:45

 

 

 
 대륙사(大陸史)의 연장, 발해
 
고구려가 멸망한 지 불과 30여년 후에 고구려 유민 대조영(大祚榮)은 목단강(牧丹江) 상류 지역의 동모산(東牟山)을 근거지로 삼아 발해(渤海)를 건국했다. 발해의 민족 구성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靺鞨族)이었다. 고구려가 예부터 말갈 등 주변 이민족들을 다스려 왔다는 점에서 발해의 건국은 사실상 고구려의 재건이었다. 발해는 당나라와도 직접 대립하는 한편, 신라와도 적대적인 관계를 이루어 고구려를 멸망시킨 데 대한 반감을 드러냈다. 반면 백제, 고구려와 화친관계였던 일본에는 여러 차례 사신을 파견하는 등 친밀감을 나타냈다. 발해는 대륙 지향의 한민족사(韓民族史)의 한 부분이다.

● 발해의 건국

670년대 나당전쟁(羅唐戰爭)에서 승리한 신라는 평양과 원산만을 잇는 선 이남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옛 고구려 영토인 만주 지역을 당나라가 차지한 것은 아니었다. 668년 평양성이 함락된 이후에도 만주 지역의 상당부분은 당의 지배 바깥에 있었다. 당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 이적(李勣)이 당(唐) 고종(高宗)에게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압록강 이북 성들 중에서 당군에게 투항한 성은 11개에 지나지 않았다. 그 밖에 당군이 공격하여 함락시킨 성이 3개, 당군을 피해 백성들이 이주해 버린 성이 7개로, 이 보고서는 당군이 만주 지역의 고구려 영토를 거의 장악하지 못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고구려 왕실이라는 중앙정부는 무너졌으나 이 광대한 지역은 고구려인들이 자치적인 형태로 생활해 나가고 있었다.

만주 북부 지역에는 말갈족(靺鞨族)이 살고 있었다. 중국인들은 말갈을 때로 물길(勿吉)이라고 불렀다.

말갈(靺鞨)은 대체로 옛날의 숙신(肅愼) 땅으로서 후위(後魏) 때에는 물길(勿吉)이라 불렀는데, 경사(京師)의 동북쪽 6천여리 떨어진 곳에 있다. 동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돌궐(突厥)과 접하며, 남쪽으로는 고구려와 경계를 이루고 북쪽으로는 실위(室偉)와 이웃하고 있다. 그 나라는 수십개의 부(部)로 나뉘어 있는데 각기 추사(酋師)가 있다. 혹은 고구려에 부속되어 있기도 하고 돌궐에 신속(臣屬)되어 있기도 하다.

구당서(舊唐書) 말갈전(靺鞨傳)


이처럼 말갈족은 고구려와 돌궐에 신속해 있었다. 그리고 680년대에는 몽골고원에서 돌궐(突厥)이 다시 일어났으나 흥안령산맥(興安嶺山脈)을 넘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런 힘의 공백 상태는 요동에서 멀리 떨어진 동북쪽일수록 심했고, 이것이 바로 이 지역에 발해가 들어서게 되는 요인의 하나가 된다.

당나라는 만주 전역을 지배하는 대신 영주(營州)에 영주도독부(營州都督府)를 설치해 이 지역을 다스리는 기관으로 삼았다. 그러나 모든 지역에 통치권이 행사되는 것은 아니었다. 당나라는 자신들의 통치권이 미치는 지역에 살던 고구려와 말갈 유민들을 영주와 그 부근으로 이주해 살게 하는 것으로 통치권을 강화하려 했다.

그런데 영주도독 조훼(趙毁)가 가혹한 통치를 행사하면서 이 지역 유민들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고종(高宗)의 부인 측천무후(則天武后)가 금륜성신황제(金輪聖神皇帝)라고 자칭한 지 3년째인 696년, 드디어 거란인(契丹人) 이진충(李盡忠), 손만영(孫萬榮) 등이 여러 부족을 규합해 봉기해서 조훼를 죽이고 영주를 점거했다. 이진충은 거란국(契丹國)을 세우고 자신을 무상가한(無上可汗)이라 부르게 하는 한편, 손만영을 대장으로 삼았는데, 그의 군대가 이르는 곳마다 호응이 높아 열흘 안에 병사의 수효가 수만명에 달하게 되었다. 측천무후는 조인사(曺仁師), 마인절(馬印節) 등 28명의 장수를 보내 진압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거란군은 오히려 단주(檀州)를 점령했다. 9월에 이진충이 사망하고 나서도 손만영이 병사들을 거느리고 계속 대당항전(對唐抗戰)을 벌여 기주(冀州)를 공격하고 유주(幽州)까지 장악했다.

놀란 측천무후는 이듬해 왕의종(王疑宗)을 앞세워 진압에 나섰고, 20만 대군의 공세에 전의를 상실한 거란의 장수 이해고(李偕固) 등이 이에 투항하고 말았다. 기세를 올린 당군은 돌궐족(突厥族), 해족(奚族) 등과 합세해 거란족의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다.

한편 이진충의 봉기로 영주 일대가 혼란에 빠지자 고구려의 유장(遺將) 대걸걸중상(大乞乞仲象)과 말갈인(靺鞨人) 걸사비우(乞四比羽) 등이 역시 봉기해 이 지역의 주민들을 대거 인솔하고 동쪽으로 이동했다. 대걸걸중상의 아들인 대조영(大祚榮)은 이 때 말갈족 추장 걸사비우와 함께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합류했다. 당나라는 대걸걸중상에게 진국공(震國公)으로, 걸사비우에게 허국공(許國公)으로 각각 봉하면서 회유하려 했으나 이들은 당나라의 회유를 거부했다.

거란족의 반란을 진압한 당군은 항복한 거란군 출신의 장수 이해고를 선봉에 세우고 이들을 추격하기 시작한다. 걸사비우가 이끄는 말갈족이 먼저 당군과 맞서 싸웠으나 대패하여 걸사비우는 전사하고 말갈족을 구원하러 달려온 대조영의 아버지 대걸걸중상마저 그 와중에 사망하고 만다. 아버지를 대신해 고구려 유민들을 수습한 대조영은 당(唐)의 정예군과 맞서 싸우는 대신, 흩어진 걸사비우 예하의 말갈족 까지 규합하면서 동쪽으로 이주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러나 당군은 추격을 멈추지 않았고 결국 지금의 혼하(渾河)와 휘발하(輝發河)의 분수령인 장령자(長嶺子) 부근의 천문령(天門嶺)에서 접전(接戰)이 벌어지게 된다. 대조영은 앞선 승전(勝戰)으로 자신감에 차 있는 당군을 기습전(奇襲戰)으로 격퇴시키는데, 이 싸움이 유명한 천문령전투(天門嶺戰鬪)이다.

이해고는 수십만에 달했던 당군 병력의 대부분을 잃고 수천기의 기병만을 이끈 채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 천문령전투(天門嶺戰鬪)는 대조영 집단이 공개적으로 나라를 세울 만한 힘이 있음을 당나라를 비롯한 대내외에 과시한 승전(勝戰)이었다.

대조영은 그 후로도 계속 동쪽으로 이동하여 목단강(牧丹江) 상류 지역에 정착,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대진(大震)이라 했으며, 칭제건원(稱帝建元)을 하여 연호를 천통(天統)으로 정했다. 대조영의 건국지라고 알려진 동모산(東牟山)은 현재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돈화현(敦化縣) 유향현(儒鄕縣)의 성산자산성(城山子山城)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건국 연대에 대해서는 구당서(舊唐書)는 성력(聖曆) 연간(698년~700년)이라고 모호하게 기록하고 있으나 유취국사(類聚國史)는 재당(在唐) 유학승 영충(永忠) 등이 보낸 글을 근거로 698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중 일본 사서인 유취국사가 정확한 연대를 적고 있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유취국사는 발해의 민족 구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백성에는 말갈(靺鞨)이 많고 사인(士人)이 적다. 모두 사인이 촌장이 되는데 대촌(大村)에서는 도독(都督)이라 하고, 다음 크기의 촌에서는 자사(刺史)라 하며, 그 아래에는 백성들이 모두 수령(首領)이라고 부른다. 땅은 매우 추워 수전(水田)에는 맞지 않으며, 습속에 자못 글을 안다.

발해국지장편(渤海國志長編) 제2권, 총략에서 재인용


굳이 말갈(靺鞨)과 사인(士人)을 구분한 것은 이들이 서로 다른 민족임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구당서(舊唐書) 발해말갈전(渤海靺鞨傳)에 나오는 "발해말갈(渤海靺鞨) 대조영(大祚榮)은 본래 고려(高麗) 별종(別種)이다."라는 구절은 대조영이 고구려 출신임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기도 하다. 발해는 곧 고구려 출신의 사인들과 말갈 출신 백성들의 결합으로 건국된 나라였다.

고구려 멸망 후 30여년 만에 그 유지(遺地)에 발해가 건국되었음에도 일단 패퇴한 당나라는 별다른 수를 쓰지 못했다. 게다가 698년 때마침 고비사막 남쪽에서 그 세력을 만회하고 남하한 돌궐(突厥)이 거란족과 해족 까지 아우르면서 하북성 정주와 조주를 점령하는 등 당나라의 요서 지역까지 위협하고 있었다. 이는 당나라와 발해 사이의 길을 끊는 상황으로 만들었고 당으로서는 더 이상 대조영이 세운 대진국을 정벌할 엄두를 못내게끔 되었다. 이런 정세를 이용해 대진국(大震國)은 요하 일부를 제외한 고구려 대부분의 영토를 차지할 수 있었다.

무력(武力) 정벌을 포기한 당은 705년 시어사(侍御史) 장행급(張幸及)을 보내 대진국을 회유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는 대진국의 건국을 현실로 인정하는 가운데 자국에 대한 조공의 틀 속에 묶어두려는 의도였다. 신생 대진국으로서도 강대국 당나라와 굳이 정면으로 맞붙을 필요는 없어 양국 사이에는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처럼 당나라가 대진을 인정하려 하자 고제(高帝) 대조영(大祚榮)은 둘째 아들 대문예(大門藝)를 보내 당에 친선의 뜻을 표했다. 대조영으로서는 고구려의 옛 땅에 고구려인이 지배하는 주권 국가를 유지할 수 있다면 굳이 분쟁의 길을 택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당나라는 대진을 인정하고 대조영을 제후로 책봉하려 했으나 거란과 돌궐이 길을 막아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713년 낭장 최흔(崔炘)을 보내 대조영을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책봉한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대진국(大震國)은 발해(渤海)로 국명이 바뀌게 되었다. 당(唐)으로서는 당시 요서 지역을 교란하고 있던 거란(契丹), 돌궐(突厥), 해족(奚族) 등에 대항하는 이른바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을 사용하려 한 것이었으나, 발해는 당과 거란, 돌궐 사이의 분쟁에는 개입하지 않으면서 내부적으로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靺鞨族)을 통합하는 일에 더욱 힘을 쏟을 수 있게 되었다.

● 당(唐)과의 전쟁과 발전

발해와 당 사이의 평화는 그러나 오래 가지 않았다.

돌궐칸국[突厥汗國]은 진작에 동돌궐(東突厥)과 서돌궐(腺厥)로 분열되었는데, 691년 형의 뒤를 이어 동돌궐의 임금이 된 묵철가한(默綴可汗)이 698년 10만 기병을 거느리고 당나라 영토인 단주, 조주, 정주 등을 공격해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발해(渤海) 고제(高帝)는 당의 공격을 막는데 돌궐을 이용할 목적으로 돌궐에 사신을 보내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당과도 우호관계를 수립해 발해의 안녕을 꾀하고자 했다. 동돌궐칸국은 동서 1만여리의 영토를 개척하고 40만 대군을 거느린 거대왕국으로 부상했으나 나라의 안정을 꾀하기보다는 전쟁에만 몰두했다. 이에 백성들의 원한을 사 많은 부족들이 이반하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묵철가한이 피살되고 필가가한(苾伽可汗)이 뒤를 이었다. 그는 당과의 전쟁이 무리라고 생각해 더 이상의 대당(對唐) 공격을 중지했다. 앞서 당(唐)은 716년 돌궐의 내분을 이용해 요서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다시 확립했으나 동돌궐의 필가가한은 내분의 와중에도 718년 당에 화친을 요구해 왔다. 따라서 돌궐은 더 이상 변수가 못되게 되었다.

726년에는 당나라가 흑룡강과 송화강이 합류하는 곳과 흑룡강 중, 하류의 광대한 지역에 걸쳐 있었던 흑수말갈(黑水靺鞨)을 포섭해 그 지역에 흑수부(黑水府)를 설치하고, 장사(長史)를 두어 다스리려 했다. 발해의 배후에 있던 흑수말갈은 당시 외교관계를 가질 때 발해의 사전 양해를 받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이러한 당의 조치는 발해와 흑수말갈 사이의 기존 관례를 파괴하는 것이자 흑수말갈이 발해의 반대세력이 될 것임을 뜻하는 것이었다. 발해로서는 당의 조치에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고제(高帝) 대조영(大祚榮)의 아들이자 발해의 두번째 황제인 무제(武帝) 대무예(大武藝)는 이를 정확하게 분석하고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흑수(黑水)가 우리 국경을 거쳐서 처음으로 당(唐)과 통했다. 지난날 돌궐(突厥)에게 토둔(吐屯)의 직을 청할 때도 모두 우리에게 먼저 알리고 함께 갔었다. 이제 뜻밖에 바로 당에게 벼슬을 청했으니 이는 반드시 당과 공모해 앞뒤로 우리를 치려는 것이다."

구당서(舊唐書) 말갈전(靺鞨傳)


배후에 친당(親唐), 반발해(反渤海) 세력의 존재를 용인할 수 없었던 무제는 전쟁을 결심하고 아우 대문예(大門藝) 등에게 군사를 주어 흑수말갈을 치게 했다. 그러나 당과 발해 사이의 친선의 상징적 불모로 당나라 수도 장안(長安)에서 시위(侍衛)한 바 있었던 대문예는 이에 반대했다.

"당은 인구가 많고 병사들이 강해서 우리보다 만배나 된다. 하루아침에 우리가 당과 원한을 맺는다면 이는 멸망을 자초하는 길이다. 옛날 고구려는 전성시절에 강병 30만으로 당나라와 맞서 싸우다가 당의 군사가 한번 덮치자 땅을 쓴 듯이 다 멸망했다. 오늘날 발해의 인구가 고구려보다 몇 배나 작은데, 당을 저버리려고 하니 결단코 옳지 못하다."

구당서(舊唐書) 발해말갈전(渤海靺鞨傳)


무제는 대문예의 이런 주장을 일축했다. 당나라의 그 강한 국력 때문에 더더욱 배후에 당의 공모세력이 존재하는 상황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무제에게는 흑수말갈의 존재를 용인하는 것이야말로 발해의 멸망을 자초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전쟁을 결심한 무제는 대문예를 전선(戰線)에서 소환하고 대일하(大壹夏)를 대신 보냈다.

이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대문예(大門藝)는 발해의 수도로 돌아오는 대신 당나라로 망명하는 길을 택했다. 분개한 무제가 당나라에 대문예를 죽일 것을 요청했으나 현종(玄宗)은 이를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에게 좌요위장군(左驍衛將軍)의 관직까지 주어 우대했다.

무제(武帝)는 이제 배후의 흑수말갈(黑水靺鞨)이 아닌 당나라에 대한 공격을 결심했고, 인안(仁安) 14년(서기 732년) 대장군 장문휴(張文休)에게 병력을 안겨 출정을 명했다. 장문휴는 발해 수군을 이끌고 발해만을 건너 산동반도의 등주(登州)를 공격했고, 자사(刺史) 위준(韋俊)을 비롯한 수많은 당나라 군인들이 전사했으며 해상무역의 중요한 거점이었던 등주는 순식간에 폐허로 변했다.

자신들을 직접 공격한 데 놀란 당황(唐皇) 현종(玄宗)은 좌령장군(左領將軍) 갈복순(葛福順)을 보내는 한편, 대문예(大門藝)를 유주(幽州)로 보내 발해군과 맞서 싸우도록 했다. 또한 당나라에 머물고 있던 신라 왕족 김사란(金思蘭)을 귀국시켜 733년 발해의 남쪽 국경을 공략하라는 명령을 전하도록 했다.

'당(唐) 현종(玄宗)은 발해말갈(渤海靺鞨)이 바다를 건너 등주(登州)를 공격하자 태복원외경(太僕員外卿) 김사란(金思蘭)을 귀국케 하여 성덕왕(聖德王)에게 부의동삼사(府儀同三司), 영해군사(寧海軍使)의 관직을 더 주면서 군사를 내어 말갈(靺鞨)의 남쪽 국경을 치게 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記) 성덕왕(聖德王) 32년 조


삼국사기(三國史記) 김유신전(金庾信傳)에 따르면, 이 때 현종은 김유신의 손자 김윤중(金允中)을 직접 지목하며 그를 장수로 삼아 발해 공격을 명했다. 이에 다라 김윤중과 그 아우 윤문(允文) 등 네 장수가 군사를 거느리고 당나라 군사와 회합해 발해를 공격했다. "당나라 군사와 회합했다."는 구절은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이 발해를 공격했음을 뜻하는데, 이들은 큰 추위와 눈을 만나 군사의 반 이상이 동사(凍死)하는 피해만 입고 퇴각했다. 흑수말갈(黑水靺鞨)을 이용해 발해를 무기력화시키려던 당나라는 오히려 등주가 일시 점령되는 수모만 당했던 것이다.

갈복순과 대문예가 거느린 당나라 군사는 발해의 서족을 공격했으나 이 역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무제(武帝)가 오히려 군대를 이끌고 산해관 부근의 마도산(馬都山)으로 진격하자 당나라는 다급해졌다. 당나라는 평로선봉(平盧先鋒) 오승자(烏承磁)를 보내 이를 막게 했는데, 그는 본영의 병마와 백성들을 거느리고 돌을 운반하여 4백리나 되는 길을 막아야 했다. 그런데 북쪽의 흑수말갈과 실위(室韋)가 5천여명의 군사를 보내 당나라와 합류하자, 무제는 자칫 남북 양쪽에서 싸우는 상황이 전개될 것을 우려해 더 이상의 남하를 중단하게 된다. 이로써 발해와 당나라 간의 전쟁은 종결되었다.

대문예(大門藝)는 당(唐)의 국력이 발해의 만배라고 했으나 이는 과장이었다.
전쟁은 분명 발해의 승리이자 당의 패배였다. 그 후에도 무제(武帝)가 대문예를 죽이기 위해 자객을 보내는 등 대당(對唐) 강경책을 고수했으나 사태가 더 이상 악화되지 않았음이 이를 말해준다. 발해의 승전(勝戰)은 신라에도 이익이 되었다. 735년에 당은 비로소 신라가 대동강 이남 지역을 차지한 것을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이는 당이 발해와 신라의 대립을 조장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으로 발해를 견제하려 한 결과였다.

무제(武帝)의 뒤를 이은 문제(文帝)는 내치(內治)에 힘을 기울이면서 평화를 추구하는 것으로 대외관계의 방향을 선회했다. 당나라에 빈번히 사신을 보내는 한편, 멀리 일본에까지 사신을 보내 자신들을 압박하는 신라를 견제하려 했다. 문제는 대흥(大興) 18년(755년)에 동모산에서 동북쪽으로 300리 정도 떨어진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로 천도했다.

발해의 국력이 신장된 데 위기를 느낀 신라 경덕왕(景德王)은 762년 황해도 지역에 6성을 축조하고 성에 태수를 두는 등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발해의 공격에 대비했다. 일본은 대흥(大興) 22년(서기 758년)에 사신을 보내 '신라정토계획(新羅征討計劃)'의 실현을 위해 발해에 협공을 제의해 왔다. 지난 663년 백제 구원을 위한 원정군을 파견하기도 했던 일본의 이런 행위에 신라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발해와 일본이 연합해 신라를 공격한다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이는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신라 또한 발해와 계속 적대관계로 일관할 경우 예기치 못한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대흥(大興) 54년(서기 791년) 사신을 파견해 관계 정상화를 제의하기도 했다.

발해는 문제(文帝)의 재위기에 발전의 기틀을 잡았으나 793년 문제가 사망하면서 내분이 발생해 818년 선제(宣帝)가 즉위할 때까지 25년 동안 정치적 혼란을 겪었다.

제9대 황제인 간제(簡帝)에 이어 제위에 오른 제10대 황제 선제(宣帝) 때에 발해는 다시 중흥의 기회를 맞게 된다.

국조(國祖) 고제(高帝)의 아우 대야발(大野勃)의 4세손으로 알려지고 있는 선제는 신당서(新唐書) 발해전(渤海傳)에 "해북(海北)의 여러 부족을 쳐서 크게 영토를 넓혔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영토를 크게 확장시킨 제왕이었다. 발해에 적대적이던 흑수말갈(黑水靺鞨)이 선제 재위 무렵부터 당나라에 조공하던 일을 중지한 것은 선제의 국력 확장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발해의 국력이 강해지자 흑수말갈이 다시 발해에게 신속(臣屬)되었던 것이다.

요사(遼史) 동경도(東京道) 조의 기록은 선제(宣帝)가 요나라 동경(東京) 요양(遼陽)에 속했던 흥요현(興遼縣)을 공격해 차지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발해가 요하 유역까지 진출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같은 기록은 "발해 국왕 대인수(大仁秀)가 남쪽으로 신라를 평정하고 북쪽으로 여러 부락을 공격하여 군(郡)과 읍(邑)을 설치했다."고 적고 있다. 이는 발해 선제(宣帝)가 고구려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 같은 정복군주였음을 보여준다. 신라 헌덕왕(憲德王) 재위 18년(서기 826년) 7월에 "한산(漢山) 이북 인민 1만을 징발해 패강(浿江) 장성 3백리를 쌓았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은 그 같은 발해의 영토 확장에 대한 신라의 대응인 것이다.

선제의 이런 대외정복전(對外征服戰) 활동으로 발해 영토는 개국 후 최대에 달하게 되었다. 동쪽으로는 바다에 닿았고, 북으로는 현재 러시아의 영토인 블라디보스토크 위쪽 올가(Olga) 강 유역에서 남으로는 함경도와 황해도 유역, 서로는 요하 근처까지 이르는 광대한 영토였다. 선제는 이 넓은 지역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이전의 3경 외에 서경압록부(西京鴨淥府)와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를 더해 5경 15부 62주로 행정조직을 정비했다. 이 중 남경남해부는 함경도 지역에 설치한 관청이라는 점에서 발해의 남진정책과 관련해 주목된다.

발해는 선제(宣帝)대에 대외관계에도 적극적이었다. 선제는 재위 12년 동안 일본에 사신을 다섯차례나 파견했을 정도였다. 반면 과거 '신라정토(新羅征討)'를 주장했던 일본은 이미 신라 침공 정복이 불가능한 현실임을 깨닫고 발해와의 관계에 크게 열성을 내지 않고 있었다. 그럼에도 발해가 일본에 사신을 자주 파견한 데에는 정치적 목적뿐만 아니라 상업적 목적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일사(日本逸史) 순화제(淳和帝) 조의 기록을 보면, 발해 건흥(建興) 8년(서기 825년) 12월에 발해 사신이 도착하자 일본의 등원서사(藤原緖嗣)는 발해 사신 일행을 '상인집단'이라며 "이들을 맞아들여 나라에 손해를 끼칠 수 없다."고 상소한 바 있다. 이는 발해의 사신 파견에 경제적 목적이 강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당나라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선제는 재위 이듬해인 819년부터 820년 사이에 무려 16회의 조공사(朝貢使)를 보내고 그 뒤에도 매년 사신을 당에 파견한 것은 평화를 구축하려는 의사도 있었지만 상업적인 목적 또한 강했던 것이다.

선제(宣帝)의 중흥 노력에 힘입어 그 뒤를 이은 제11대 황제 장제(莊帝) 대이진(大彝震), 제12대 황제 안제(安帝) 대건황(大虔晃), 제13대 황제 경제(景帝) 대현석(大玄錫)에 이르기까지 발해는 국력을 크게 떨쳐 당나라로부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칭호를 듣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런 발해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료들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자신의 역사서를 전하지 못한 발해를 대신해 기록자의 역할을 맡았던 당나라도 내부 혼란에 휩싸여 기록을 제대로 남기지 못하면서 발해의 본모습을 찾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 되었다. 심지어 발해의 마지막 황제인 애제(哀帝) 대인선(大璘禪)은 제13대 황제인 경제(景帝)를 계승한 제14대 황제로 알려져 왔었다. 이를 발해국지장편(渤海國志長編)을 쓴 정암(靜庵) 김육불(金毓拂)이 1933년 당회요(唐會要)를 통해 발해왕(渤海王) 대위해(大瑋楷)라는 인물이 당나라 황제의 칙서를 받은 기사를 찾아냄으로써 대위해가 경제를 계승한 제14대 황제가 되고 애제는 대위해를 계승한 제15대 황제가 되었다. 발해국지장편에 따라 발해의 역대 황제가 15명이었음이 알려질 정도였다.

이 무렵 당은 지방 세력화한 절도사들이 자주 반란을 일으키고 870년대에는 유명한 황소(黃巢)의 대란(大亂)이 일어나는 등 극도의 혼란기였다. 그러나 당시 발해의 국력은 친신라(親新羅) 세력인 당나라 조차 신라보다 우위에 있다고 인정할 정도였다. 최치원(崔致遠)의 고운집(孤雲集)을 보면 897년 사신으로 왔던 발해 황자 대봉예(大封裔)가 신라 사신보다 윗자리에 앉겠다고 주장하자 당나라에서는 "국명(國名)의 선후는 강약으로 따지는 것이 아닌데 조제(朝制)의 순서를 어찌 성쇠(盛衰)의 근거로 바꿀 수 있겠는가?"라며 거절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를 통해 당시 발해 국력의 정도를 알 수 있다.

 
● 발해는 황제국(皇帝國) 체제였다.

고구려사(高句麗史)와 발해사(渤海史)를 중국 역사에 귀속시키기 위해 동북공정(東北工程)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중국 사회과학원에서는 발해에 대해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가 아니라 말갈족(靺鞨族)이 세운 왕국이며 자주국으로 볼 수 없고 당(唐)의 지방정권이었다는 설명을 전개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남,북한의 발해사(渤海史) 연구자들로부터 거센 반발을 사고 있으나 중국 학자들은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과연 발해는 어떤 나라였을까?

발해사 관련 문헌과 금석문(金石文)에 따르면 발해의 군주는 황제(皇帝)를 자칭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고제(高帝) 대조영(大祚榮)이 자신의 맏아들 대무예(大武藝)에게 계루군왕(桂婁郡王)이란 칭호를 준 것으로 증명될 수 있다. 책부원구(冊府元龜) 제1000권을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발해왕(渤海王) 무예(武藝)는 본래 고려(高麗; 高句麗)의 별종(別種)이다. 그의 아버지 조영(祚榮)이 동쪽에서 계루(桂婁)의 땅을 차지하고 자립하여 진국왕(震國王)이 되었는데 무예를 계루군왕(桂婁郡王)으로 삼았다.'

그리고 같은 책 제954권 당(唐) 현종(玄宗) 개원(開元) 8년(서기 720년) 8월 초의 기사를 보면 현종이 대무예의 아들 대도리행(大都利行)을 계루군왕에 책봉했다는 대목이 있다. 군왕(郡王)이란 무엇인가? 보통 황제(皇帝)는 자신의 아들을 왕(王)에, 손자나 조카를 군왕(郡王)에 책봉하는 것이 관례이다. 그러면 대조영은 맏아들 무예를 계루군왕(桂婁郡王)이 아니고 계루왕(桂婁王)에 책봉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대무예의 계루군왕 책봉은 계루왕 책봉으로 보는 것이 맞다. 그런데도 책부원구(冊府元龜)는 왜 대무예를 계루군왕에 책봉하였다고 했을까? 당나라의 관료들은 발해를 황제국(皇帝國)으로 부르기를 몹시 꺼려하여, 대무예가 아버지 대조영으로부터 계루왕의 책봉을 받았건만 이를 계루군왕으로 격하시켰다고 보는 것이 옳다. 따라서 대무예의 계루왕(桂婁王) 책봉은 대도리행의 계루군왕(桂婁郡王) 책봉과 다름을 알 수 있다.

이렇듯 대무예(大武藝)가 아버지인 대조영(大祚榮)으로부터 계루왕(桂婁王)의 책봉을 받았음은 발해가 황제국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그러면 또 다른 근거는 없을까? 협계태씨족보(俠溪太氏族譜)의 선조세계(先祖世系)를 보면 대조영의 아우인 대야발(大野渤)이 검교태위(檢校太慰) 반안군왕(盤安君王)이 되었다는 기사를 만날 수 있다. 그도 발해 황제로부터 왕(王)의 책봉을 받은 것이다. 대무예나 대야발이 소왕(小王)이듯이 고려후국(高麗侯國)의 왕도 마찬가지였으며, 이런 점으로 보아 발해의 최고 통치자는 소왕(小王)들을 거느린 대왕(大王), 즉 황제(皇帝)였음을 알 수 있다.

발해가 황제국이었음은 문제(文帝) 대흠무(大欽茂)의 넷째 딸 정효공주(貞孝公主)의 묘비문(墓碑文)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정효공주묘비(貞孝公主墓碑)는 발해 사람들이 직접 남긴 기록이다. 그런 면에서 발해사 연구에서 귀중한 자료임은 긴 설명이 필요없다. 중국의 길림성(吉林省) 화룡현(和龍縣) 용두산(龍頭山)에서 발견된 묘비에는 728자로 씌여진 문장이 새겨져 있다. 비문에는 공주의 부왕을 황상(皇上)이란 칭호로 표현하고 있으며 비문의 앞부분에 있는 '규예강제녀지빈(硅汭降帝女之濱)'이란 구절은 정효공주를 시집보낸 것을 중국의 전설적인 요(堯) 임금이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이란 딸들을 규예강가에 내려 보내 순(舜) 임금에게 시집보낸 것과 견주어 발해 황족을 중국 요 임금과 그 가문의 수준으로 높이 받들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배중화이방하우(配重華而芳夏禹) 도은탕이도주문(陶殷湯而韜周文)'이란 구절을 풀이하면 정효공주(貞孝公主)의 조상은 중화(순 임금)와 견줄 만하고, 하(夏)의 우왕(禹王)과 비슷하며, 은(殷) 탕왕(湯王)의 지혜를 따라가고 주(周) 문왕(文王)의 계략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정효공주묘비(貞孝公主墓碑)에서는 고대 중국의 가장 우뚝 솟은 제왕들과 대등하다고 찬양하였음을 직시할 수 있다.

발해의 관제(官制) 중에는 황제국에서만 나타나는 삼사삼공제(三司三公制)와 작호제(爵號制)등이 있었다. 요사(遼史)에 보면 발해가 멸망한 다음 해인 927년 거란(契丹)은 발해의 사도(司徒)였던 대소현(大素賢)을 동란국(東丹國)의 좌차상(左次相) 벼슬에 임명한 기록이 있다. 사도는 태위(太慰), 사공(司公)과 함께 3공의 하나로써, 3공제가 발해에 있었음을 여기서 알 수 있다. 보통 3공제는 3사제와 병존하는 만큼 태사(太師), 태부(太簿), 태보(太輔)의 3사제 역시 발해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국왕에게 스승의 대우를 받는 3사는 최고의 벼슬로서 국왕에게 충고를 하며, 3공은 모든 관청을 지도하는 위치에 있으면서 제후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처럼 제후적 존재가 발해에 있었다는 것은 발해가 황제국으로서의 제도와 틀을 가지고 있었으며 황제인 군주 밑에 소왕(小王)들이 제후로서 존재하였음을 말해준다.

이제 발해의 봉작제(封爵制)에 대해 알아보자. 대개 봉작제는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작(男爵)의 5등급으로 되어 있다. 속일본기(續日本紀) 순인제(淳仁帝) 천평보자(天平寶字) 2년(서기 758년) 9월 기사에는 '발해대사(渤海大使)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겸 장군 행목저주자사(行木底州刺史) 겸 병서소정(兵署小正) 개국공(開國公) 양승경(楊承慶) 이하 23명이 다모리를 따라 내조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또 같은 책 천평보자(天平寶字) 6년(762년) 10월 기사에는 '그 나라 사신 자수대부(紫綏大夫) 행정당좌윤(行政堂左允) 개국남(開國男) 왕신복(王新福) 이하 23명이 내조하였다.'는 내용이 있고, 이 외에 759년 일본에 온 발해의 사신 고남신(高南新), 798년 일본에 온 사신 대창태(大昌泰), 926년 발해 멸망 직후 고려에 온 박어(朴漁) 등도 모두 개국공(開國公), 개국자(開國子), 개국남(開國男) 등의 작위를 가지고 있었다.

이로써 발해에 봉작제(封爵制)가 있었으며 이러한 봉작제도를 가진 발해는 황제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제국으로서 발해는 황제만이 쓸 수 있는 연호까지 사용하고 있었다. 신당서(新唐書) 발해전(渤海傳)은 발해가 일관되게 연호를 사용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제2대 황제인 무제(武帝) 대무예(大武藝)은 인안(仁安), 제3대 황제인 문제(文帝) 대흠무(大欽茂)는 대흥(大興), 제5대 황제인 성제(成帝) 대화여(大華與)는 중흥(中興), 제6대 황제인 강제(康帝) 대숭린(大崇隣)은 정력(正曆), 제7대 황제인 정제(定帝) 대원유(大元瑜)는 영덕(永德), 제8대 황제인 희제(僖帝) 대신의(大言義)는 주작(朱雀), 제9대 황제인 간제(簡帝) 대명충(大明忠)은 태시(太始), 제10대 황제인 선제(宣帝) 대인수(大仁秀)는 건흥(建興), 제11대 황제인 장제(莊帝) 대이진(大彛震)은 함화(咸和)를 각각 연호로 지정하였다. 또한 협계태씨족보(俠溪太氏族譜)를 보면 초대 황제인 고제(高帝) 때의 연호가 천통(天統)이란 것도 보인다.

아무튼 연호가 사용된 걸로 보아 발해가 황제국이었음은 분명하다. 이렇듯 발해가 황제국으로서의 체제와 면모를 갖추었음은 발해가 주권 국가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중국에서는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 정권 또는 속주인 것처럼 왜곡하고 있다. 그러나 발해는 당나라의 책봉을 받고 세워진 나라가 아니라 당나라의 패권주의에 대항한 자주국이었다.

발해가 당나라의 외교적 승인을 받지 않고 건국된 만큼 자주권을 지닌 제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음은 누구보다 당나라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당나라가 713년에 발해의 군주를 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 발해군왕(渤海郡王)에 책봉한 것을 발해에서 받아들였다고 해서 발해를 당나라의 속국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에 지나지 않는다.

잘 알려져 있듯이 당시 동아시아에서는 책봉과 조공이 외교적 관행처럼 통용되고 있었다. 중국의 역대 통치자들은 대등한 형식의 대외무역보다 상하의 질서를 바탕으로 한 예물 교환 형식의 무역만을 인정하여 이를 다른 나라들에게 요구하였다. 중국의 역대 정권은 무역상 물자의 손실을 보면서도 조공 형식의 무역을 통해 자아도취(自我陶醉)에 빠져 있었다. 그러므로 중국이 원하는 무역 관행에 따라준 국가를 속국이라고 하는 것은 중국적인 표현은 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역사상 합리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외교적 문제이다.

중국식의 표현대로라면 흉노(匈奴)에 막대한 양의 조공을 해마다 바친 한(漢), 그리고 요(遼)와 금(金)에 적지 않은 양의 조공을 바친 송(宋)도 모두 속국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중국인 중에 이런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다.

발해가 당(唐)과 무역 거래를 했기 때문에 중국 학자들은 발해를 당나라의 지방정권 또는 속국이었다고 견강부회(牽强附會)를 하고 있으니 참으로 웃지도 못할 일이 아닐 수 없다. 발해가 당나라의 속국이었다면 대외정책을 독자적으로 집행할 수 없다. 그러나 발해는 당나라의 군사적 강압에 굴복하거나 맹종한 일이 없다. 오히려 발해는 당나라의 강압적인 태도에 맞섰으며 필요할 때는 단호하게 무력(武力)을 행사했다.

당나라가 말갈(靺鞨) 부족 중 가장 호전적인 흑수말갈(黑水靺鞨)을 끌어들여 발해를 외교, 군사적으로 고립시키려 했을 때 발해는 즉각 흑수말갈에 대한 원정을 단행하였고, 등주기습전(登州奇襲戰), 마도산전투(馬都山戰鬪) 등을 통해 당나라를 공격한 것은 발해가 자주적인 국가였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렇듯 발해가 당나라의 부당한 태도에 징벌(懲罰)로 맞선 것은 과거 중국의 침략 세력을 물리친 고구려의 계승 국가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 발해의 쇠퇴와 멸망

발해는 제13대 황제인 경제(景帝) 대현석(大玄錫)과 제14대 황제인 대위해(大瑋楷) 시기를 지나 시기를 지나 제15대 황제인 애제(哀帝) 대인선(大認選) 때에 이르러 위기를 맞게 된다. 대인선이 재위하던 10세기 초엽은 동아시아 전체가 거대한 격변에 휩싸여 있었다.

먼저 한반도에서는 신라의 중앙 통제력이 마비되면서 각지의 지방세력이 일어나 후삼국시대(後三國時代)가 전개되었다. 당나라의 경우는 지방 절도사들이 번진(藩鎭)세력화하여 중앙정부에 도전했는데 그 중 하남(河南) 지역의 선무절도사(宣武節度使) 주전충(朱全忠)이 907년 애종(哀宗)을 폐위시키고 후량(後梁)을 세움으로써 당은 멸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후량도 얼마 가지 못해서 산서(山西) 지구의 하동(河東) 절도사 이극용(李克用)의 아들 이존욱(李存勖)에게 923년 멸망당하고 말았다. 이존욱은 또 후량을 멸망시킨 후 위주(魏州)에서 후당(後唐)을 세우는 등 중원은 극도로 혼란스러웠다.

이 무렵 발해가 국력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었더라면 동아시아 전체의 이런 혼란한 정세는 국력 신장에 결정적인 호기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호기를 적극 이용한 세력은 발해가 아니라 열하(熱河) 북쪽의 거란(契丹)이었다.여러 부족으로 흩어져 있던 거란족은 10세기 초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가한(可汗)의 지위를 계승하면서 주변 거란족들을 통합해 916년 황제를 자칭하게 되었다. 그는 916년과 921년 남하해 중원의 여러 성을 공략하고 많은 한인(漢人)들을 사로잡았다. 이로써 중원 공략에 자신을 얻은 그는 먼저 동쪽 발해 문제를 매듭짓고 중원으로 쳐들어가려고 결심하게 되었다. 그는 925년 12월 "발해는 대대로 원수지간인데도 아직 설욕을 못했으니 어찌 편안히 있을 수 있겠는가?"라며 대원수 요골(堯骨) 등을 거느리고 직접 발해 정벌에 나섰다.

거란이 발흥하자 발해의 황제 대인선(大認選)은 개국 이래의 적국이었던 신라와도 교결(交結)하는 등 주변 여러 나라들과 동맹을 맺어 거란과 맞서려 했다. 그러나 신라는 915년과 925년 발해와의 관계를 파기하고 거란과 관계를 맺었다. 요사(遼史)에 따르면 신라는 나아가 925년 요(遼) 태조(太祖)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발해를 정벌할 때 일부 군사를 파견해 거란군을 지원했다. 이 때 파견된 신라군은 당시의 혼란스런 신라의 상황으로 보아 많은 수는 아니었겠지만 이는 발해가 완전히 고립된 상태에서 거란과 싸워야 한다는것을의미했다. 후삼국 중 하나인 태봉(泰封)도 915년과 918년 3월 거란에 사신을 보내 교결했으며, 918년 6월 왕위에 오른 왕건도 이런 외교정책을 지속했다.

야율아보기는 925년 윤12월 21일, 발해 공략에 나서 29일 발해의 서쪽 국경 요충지인 부여부(夫餘府)를 포위했다. 이는 9일만에 무려 1천여리를 진군항 것이었으니 발해의 방어선은 거의 붕괴된 셈이었다. 부여부가 이듬해인 926년 정월, 불과 3일만에 함락된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발해에서는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노상(老相)이 군사 3만여명을 거느리고 거란군과 맞섰으나 전멸되고 말았다.
발해의 주력군을 격파한 거란군은 파죽지세로 동진해 같은 달 9일 발해 수도인 홀한성(忽汗城)을 포위했다. 발해의 황제 대인선은 12일에 더 이상의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했으며 14일 정식 항복 절차를 밟았다. 이로써 발해는 건국 229년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대인선은 그 해 7월 회군하는 거란군의 포로가 되어 황후와 함께 끌려가 거란이 정해준 상경임황부(上京臨遑府)의 서쪽에 살았다. 대인선은 거란에서 야율아보기가 정해준 오로고(烏魯古)란 이름을 사용했는데, 요사(遼史) 국어해(國語解)에 따르면 오로고는 야율아보기가 발해를 정벌할 때 탔던 군마(軍馬)의 이름이었다.

발해는 만주의 광대한 영토를 차지했으나 발전을 위해서는 핵심 영토인 요양 지역을 장악하고 나아가 요서 지역을 차지해야 했었다. 그러나 이런 노력 대신에 만주 동북부의 광대한 영토에 만족했다. 즉 발해가 현실에 안주하는 동안 세력을 길러 요양 지역을 차지하고 동진한 거란족에게 멸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역사에서 진취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 발해의 주민은 대부분 고구려계 사람들이다.

발해의 주민은 고구려계, 말갈계 등 다양하였다. 그러나 주민의 대부분은 고구려 유민이었다. 총 인구의 70~80% 이상이 고구려계였으며 말갈(靺鞨) 사람과 그 외의 종족은 아주 적었다. 이들 말갈 사람들은 주민 구성에서 적은 비중을 차지하다 보니 이들의 거주지에는 주현제(州縣制)가 실시되지 않았다. 게다가 생활 습관상 한 곳에 거처를 정하고 사는 농경 정착민이 아니라 사냥터를 찾아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수렵, 유목민이기 때문에 발해나 요나라 때까지 이들 말갈인(靺鞨人)들은 정착 생활에 이르지 못해 이들을 대상으로 주현제를 실시할 수 없었다. 주현제 아래의 통치 대상은 정착, 농경 생활을 하는 고구려 유민이지 말갈인이 아니었다.

구당서(舊唐書) 등 중국의 문헌과 일본의 자료도 대조영(大祚榮)을 고구려 왕실의 후예라고 여기고 있다. 특히 발해의 황실은 고구려 왕실을 계승한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이는 771년 문제(文帝)가 일본 국왕에게 보낸 국서에서 발해 황실이 천손국(天孫國) 고구려 태왕(太王)의 후예임을 밝힌 점으로 알 수 있다.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하였다고 전하는 자료들은 발해가 고구려의 주민 구성과 그 면모를 계승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먼저 신라 말기의 대학자인 최치원(崔致遠)은 당나라의 태사시중(太師侍中)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구려의 남은 무리가 북으로 태백산 아래 모여 나라 이름을 발해라고 하였다."라고 썼다. 또한 당나라의 다른 관리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옛날 당나라의 태종 황제가 고구려를 쳐서 없앴는데, 그 고구려는 지금 발해가 되었다."라고 썼다. 또 727년 무제(武帝)가 일본에 파견한 사신을 통해 발해의 창건을 알리고 수교를 제의하면서 "발해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부여 이래의 전통과 풍속을 가지고 있다."고 선언하였다. 이처럼 국서에서 고려태왕(高麗太王; 고구려 국왕의 존칭)이라고 하자 일본 국왕의 답서 역시 고려태왕에게 보낸다고 하였다.

이렇듯 발해와 고구려는 완전히 같은 뜻으로 통용되고 있었다. 이는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하였음을 뜻하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발해에 말갈인(靺鞨人)들이 많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고구려 시대에도 이들 말갈 사람들이 많았던 것처럼 왜곡하였다. 먼저 신당서(新唐書)는 645년 안시성전투(安市城戰鬪)시 15만명의 지원군을 이끌고 출전한 고구려의 남부욕살(南部縟薩) 고혜진(高惠眞)을 말갈인으로 서술하였다. 고혜진이 말갈인이었다면 그는 15만명으로 구성된 고구려, 말갈 연합군의 지휘관이 될 수 없다. 고혜진을 말갈인인 것처럼 쓴 것은 15만명의 지원군을 말갈인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며 그렇게 하면 발해를 말갈인의 나라로 조작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오게 된다. 다시 말해 고혜진을 말갈 사람으로 써놓은 것은 발해를 말갈인의 국가로 조작하기 위함이다.

발해는 동쪽과 북쪽으로 영토를 확대하였으나 그곳에 고구려계 유민들을 대거 이주시킬 수 없었다. 확장된 신영토 가운데 본토에서 가까운 지역으로 이들 유민들이 이주하였으므로 일부 지역에서 군현제(郡縣制)가 실시되었으나 실시되지 못한 지역도 있었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는 고구려의 주민 구성을 그대로 계승하였으므로 그 영토 안의 말갈인은 역시 적었다.

그런데 대조영이 698년에 발해를 세웠을 당시 그 영역은 그다지 넓지 않았다. 그러다가 대조영이 오동성을 중심으로 영토를 급속히 확대하면서 고구려계 유민들이 발해의 건국 소식을 듣고 급속히 모여들었다.

일부 사가는 발해가 고구려의 계승국임을 부인하기 위하여 고지설(故地說)을 조작하였다. 마치 발해의 주민이 여러 종족으로 구성된 것처럼 꾸몄다. 특히 신당서(新唐書)는 발해에 고구려의 옛 땅이 매우 적고, 숙신(肅愼)의 옛 땅, 읍루(挹婁)의 옛 땅이 더 많은 것처럼 왜곡하였다. 신당서 제219권 발해전(渤海傳)은 발해의 주민 구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1) 숙신(肅愼)고지로서 상경(上京)을 삼고 용천부(龍泉府)라 하였으며

2) 예맥(濊貊)고지로서 동경(東京)을 삼고 용원부(龍原府)라 하였다

3) 고려(高麗)고지로서 서경(西京)을 삼고 압록부(鴨綠府)라 하고  …  장령부(長嶺府)라고 하였다

4) 부여(夫餘)고지로서 부여부(夫餘府) …  막힐부(幕詰府)를 삼았다

5) 읍루(揖婁)고지로서 정리부(定理府) …  안변부(安邊府)를 삼았다

6) 옥저(沃沮)고지로서 남경(南京)을 삼고 남해부(南海府)라고 하였다

7) 솔빈(率賓)고지로서 솔빈부(率賓府)로 삼았다

8) 불열(拂涅)고지로서 동평부(東平府)를 삼았다

9) 철리(鐵利)고지로서 철리부(鐵利府)를 삼았다

10) 월회(越淮)고지로서 회원부 … 안원부를 삼았다

위에서 보면 서경 압록부(西京鴨綠府)와 장령부(長嶺府)만 고구려의 옛 땅으로 되어 있고, 나머지 고지(故地)에는 고구려가 아닌 다른 종족의 이름이 있다. 사실상 10개의 고지는 대부분 고구려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의 고지라고 한 것은 2개뿐이며 나머지는 고구려와 관련이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대로 보면 나머지 지역은 고구려와 관련이 없거나 적다는 것이다. 사실 알고 보면 옥저고지, 부여고지, 예맥고지, 솔빈고지 등은 고구려에 통합된바 우리 민족의 갈래에 속하는 족속들이 살던 곳이다. 옥저(沃沮)와 부여(夫餘), 예맥(濊貊), 숙신(肅愼)은 고구려에 통합된 만큼 고구려의 고지라고 해야 옳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많은 고지가 고구려(高句麗)가 아닌 다른 민족의 고지로 둔갑되었을까? 그것은 발해국(渤海國)을 고구려의 주민 구성을 계승하지 않은 국가로 조작하기 위함이다. 즉 발해국의 주민이 마치 말갈(靺鞨)의 여러 종족들로 구성된 것처럼 꾸며 역사를 날조하기에 이른 것이다. 불열(拂涅), 철리(鐵利), 월희(越淮), 솔빈(率賓), 부여(夫餘), 읍루(揖婁)의 고지는 사실상 고구려의 옛 땅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하다.

발해에서 고구려 외의 이민족들이 집단적으로 살 만한 부는 흑수부(黑水部) 외에 없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본토인 발해 영역 안에는 고구려의 주민 구역이 아닌 다른 고지 이름을 붙일 만한 장소가 없다. 그러므로 발해의 주민 구성과 관련하여 신당서에서 이민족의 고지를 든 것은 허구에 불과하며 발해의 주민 구성과 관련이 적거나 없다는 것이 맞는 표현이다.

발해국의 통치 기구는 동족인 고구려의 유민을 다스렸지, 이민족(異民族)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발해국의 지배층은 같은 고구려 유민으로 구성된 피지배층을 다스렸지, 이민족으로 구성된 피지배층을 다스린 것이 아니었다.  발해의 통치 기구가 이민족을 통치하기 위한 기구였다면 발해의 주민은 대부분 이민족인 말갈족이었을 것이나, 발해국의 통치 기구는 구성과 기능 면에서 이민족 통치 기구가 아니었다.

발해의 통치 기구를 보면 이민족 통치에 편리하도록 편성된 요나라의 이중 통치 제도 같은 것이 없었을 뿐 아니라, 정복 종족인 여진족(女眞族)이 피지배 종족인 한족(漢族)의 경제와 문화에 반하여 그들의 통치 제도를 모방한 금나라의 통치 기구 같은 것도 없었다. 게다가 발해의 통치 기구 안에는 말갈족(靺鞨族)의 통치 제도를 수용한 것도 없었다.

신당서(新唐書)에는 발해국의 중앙 통치 기구로 3성, 6부, 12사, 1대, 8사, 1원, 1감, 10위가 실려 있는데 이 기구들은 동족인 고구려 유민의 피지배층을 다스리는 것이었다. 발해국의 지방 통치 기구로는 주현제(州縣制)만 있었지, 부족제(部族制)는 없었다, 주현제만 있었다는 것은 지방 통치 기구가 농경인만을 통치 대상으로 삼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부족제도가 없었음은 떠돌아 다니면서 생활하는 말갈족을 다스리는 지방 통치 제도가 없었음을 의미한다. 이로써 발해국의 주민 가운데 말갈족이 매우 적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발해의 중앙 정치 제도와 지방 행정 제도에 이민족에 대한 통치 제도가 없었다는 것은 발해에 고구려 유민을 제외하고 문명한 다른 민족이 없었을 뿐 아니라 혹 있었더라도 그 수가 적었음을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있듯이 말갈인(靺鞨人)들이 인구 면에서 많았고 피지배계급 중 다수였다면 발해국의 지배층은 이들 말갈인들을 위한 통치 기구를 만들어 이를 다스리기 위한 대책을 마련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발해국의 삼성육부(三省六部)의 중앙 통치 기구와 오경(五京) 십오부(十五部) 육십이주(六十二州)의 지방 행정 기구는 말갈족을 다스리기 위한 통치 기구가 아니고 고도의 농경 문화를 지니고 있는 고구려인을 다스리기 위한 제도적 장치였다. 이를 전제로 발해국의 통치 기구를 만든 것은 고구려 유민이었으며, 이런 통치 기구에 따라 통치를 받은 것도 고구려 유민이었음에 틀림없다.

발해가 관할하는 오경(五京) 십오부(十五部) 지역과 요동 지역에 있었던 발해의 제후국인 고려후국(高麗侯國)이 관할하는 주현(州縣)의 주민은 고구려 유민이었다. 그러나 발해국의 동북부 지역의 경우 주민의 기본은 말갈 사람이었다. 이들 말갈인(靺鞨人)이 사는 지역에는 주현제(州縣制)가 실시되지 않았으며, 역참(驛站)도 설치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일본의 견당(遣唐) 유학승인 나카츄우[永忠]의 글은 참고할 만하다.

" … … (발해국에는) 주현과 관역이 없으며 곳곳에 마을이 있는데, 모두 말갈 부락이고 그 백성은 말갈인이 많으며, 토인(고구려인)은 적다. 모두 토인으로서 촌장을 삼는데 큰 촌은 도독, 다음은 자사이다. 그 아래의 백성은 모두 수령이라고 한다."      

유취국사(類聚國史)


이 기사를 두고 많은 사람들은 일본의 사신 일행이 일본도(日本道)를 통해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에 도착한 다음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로 가는 도중에 직접 보고 들은 주민의 구성 상황을 전한 것이라고 여겨 왔었다. 그러나 이 기사는 일본의 사신이 발해국의 어떤 지역 사정에 대해 전해 들은 내용을 기록한 것 같다. 이 기록은 주현(州縣)이 없는 발해국의 북부 지역 사정을 전한 것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일본인 사신이 발해국에 도착하는 동경용원부에 역참(驛站)이 있었음은 당나라의 지리학자인 가탐(賈耽)의 도리기(道離記)에 신라의 천정군에서 책성까지 39개 역이 있었다는 점으로 알 수 있다. 또한 동경용원부에서 상경용천부로 가는 도중에도 역참이 있었다. 게다가 발해의 남쪽 국경과 동경용원부를 잇는 연변에도 역참이 있었다(어랑군 회문리와 김책시 동흥리, 청진시 송편구역 송평도,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연길시 용정현에는 역참 유적인 24개의 돌 유적이 남아 있다.).

이렇듯 발해에는 역참이 있었는데도 나카추우[永忠]가 발해에 역참(驛站)이 없다고 한 곳은 발해의 중심지가 아닌 주현이 없는 변방 지역이었을 것이다. 나카추우의 기록에서 토인이 적고 말갈 사람이 많으며 주와 현이 없다고 한 곳은 발해국의 변방 지역을 전한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토인이 적고 말갈 사람이 많다고 했는데, 사실은 토인이 거의 없고 말갈 사람들이 절대 다수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러면 그곳은 어디였는가? 철리부(鐵利府)와 안변부(安邊府)의 경우 부는 설치되었으나 주나 현이 설치되지 않았는데, 나카추우의 기록은 바로 이런 지역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를 바탕으로 발해국 본토의 주민 구성으로 말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다음은 주민 구성과 관련하여 흑수말갈(黑水靺鞨)로 눈을 돌려보자. 흑수말갈의 북부에는 사모말갈, 군리말갈, 굴열말갈, 막예개말갈 등의 부족이 있었다. 흑수말갈이 발해에 예속된 뒤에 이들도 발해에 예속하여 그 지역은 발해의 영역에 편입되었다. 당회요(唐會要) 말갈전(靺鞨傳)에는 "옛날에 말하기를 흑수의 서북에 사모말갈이 있고 그 북쪽에서 약간 동쪽으로 10일 가면 군리말갈이 있으며 동북으로 10일 더 가면 굴열말갈이 있는데 굴열(屈說)이라고도 한다. 동남으로 10일 더 가면 막예개말갈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 말갈이 살았던 지역(하바로프스크에서 오호츠크해)은 8세기 중엽 흑수말갈의 통제에서 벗어나 발해의 판도에 편입되었다. 발해는 그 우두머리들을 장악하여 이 말갈부들을 통제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신당서(新唐書) 흑수말갈전(黑水靺鞨傳)을 보면 발해가 강성해지자 말갈이 모두 발해에 속하였다는 기사가 보여주듯이 이 말갈은 흑수말갈의 발해국 복속 시기에 함께 발해에 복속하였다.

이처럼 흑수말갈과 그 예속하에 있었던 여러 부족가지 모두 발해에 편입됨으로써 동북방의 종족은 매우 다양해졌다. 그러나 이들이 발해에 복속한 시기는 한 세기 남짓하였으며 주민수도 매우 적어 발해의 주민 구성에 큰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결국 발해의 주민은 본토의 고구려계 주민이 중심을 이루었으며 동북 변방의 말갈계 주민은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였다.

참고서적
휴머니스트(humanist) 版「살아있는 한국사 -한국 역사 서술의 새로운 혁명」
경세원 版「다시 찾는 우리 역사」
한국 교육진흥 재단(재단법인) 版「반만년 대륙 역사의 영광- 하나되는 한국사」
대산출판사 版「고구려사(高句麗史) 7백년의 수수께끼」
서해문집 版「발해제국사(渤海帝國史)」
충남대학교 출판부 版「한국 근현대사 강의」
두리미디어 版「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해설자
이덕일(李德一)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영우(韓永愚) 한림대학교 인문학부 석좌교수
고준환(高濬煥) 경기대학교 법학과 교수
서병국(徐炳國) 대진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이인철(李仁哲)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위원
박걸순(朴杰純) 충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조왕호(趙往浩) 대일고등학교 교사
 
{이상}
 
원문 「영광과 좌절, 희망의 한국사」15.대륙사(大陸史)의 연장, 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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