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 &書 ■/■ 人 生....

무소유(無所有) ...

구름에 달 가듯이 2011. 5. 19. 03:44

 

법정(法頂)스님

 

  법정스님의 모습

 
 

나는 가난한 탁발승이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젖 한 깡통, 허름한 담요 여섯 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 이것뿐이오."

마하트마 간디가 1931년 9월 런던에서 열린 제2차 원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가던 도중 마르세유 세관원에게 소지품을 펼쳐

보이면서 한 말이다. K.크리팔라니가 엮은 <간디 어록>을 읽다가

이 구절을 보고 나는 몹시 부끄러웠다. 내가 가진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의 내 분수로는 그렇다.

 

사실,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날 때 나는 아무것도 갖고 오지 않았었다.

살 만큼 살다가 이 지상의 적에서 사라져 갈 때에도 빈손으로 갈

것이다. 그런데 살다 보니 이것저것 내 몫이 생기게 되었다.

물론 일상에 소용되는 물건들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없어서는 안 될 정도로 꼭 요긴한 것들만일까?

살펴볼수록 없어도 좋을 만한 것들이 적지 않다.

 

우리들이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적잖이 마음이 쓰이게 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갖는다는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를 얽매인다는 뜻이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 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흔히

자랑거리로 되어 있지만,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나는 지난해 여름까지 난초 두 분을 정성스레, 정말 정성을 다해

길렀었다. 3년 전 거처를 지금의 다래헌으로 옮겨 왔을 때 어떤

스님이 우리 방으로 보내 준 것이다. 혼자 사는 거처라 살아 있는

생물이라고는 나하고 그 애들 뿐이었다. 그 애들을 위해 관계서적을

구해다 읽었고, 그 애들의 건강을 위해 하이포넥스인가 하는 비료를

구해 오기도 했었다. 여름철이면 서늘한 그늘을 찾아 자리를 옮겨

주어야 했고, 겨울에는 그 애들을 위해 실내 온도를 내리곤 했다.

 

이런 정성을 일찍이 부모에게 바쳤더라면 아마 효자 소리를 듣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렇듯 애지중지 가꾼 보람으로 이른 봄이면 은은한

향기와 함께 연둣빛 꽃을 피워 나를 설레게 했고, 잎은 초승달처럼

항시 청청했었다. 우리 다래헌을 찾아온 사람마다 싱싱한 난초를

보고 한결같이 좋아라 했다.

지난해 여름 장마가 갠 어느 날 봉선사로 운허노사를 뵈러 간 일이

있었다. 한낮이 되자 장마에 갇혔던 햇볕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고

앞 개울물 소리에 어울려 숲속에서는 매미들이 있는 대로 목청을

돋구었다.

 

아차! 이때서야 문득 생각이 난 것이다.

난초를 뜰에 내놓은 채 온 것이다.

모처럼 보인 찬란한 햇볕이 돌연 원망스러워 졌다.

뜨거운 햇볕에 늘어져 있을 난초잎이 눈에 아른거려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허둥지둥 그 길로 돌아왔다. 아니나다를까, 잎은 축 늘어져

있었다. 안타까워하며 샘물을 길어다 축여 주고 했더니 겨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어딘지 생생한 기운이 빠져 나간 것 같았다.

 

나는 이때 온몸으로 그리고 마음 속으로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집착이 괴로움인 것을. 그렇다. 나는 난초에게 너무 집념한 것이다.

이 집착에서 벗어나야 겠다고 결심했다. 난을 가꾸면서는 산철에도

나그네 길을 떠나지 못한 채 꼼짝을 못했다. 밖에 볼일이 있어 잠시

방을 비울 때면 환기가 되도록 들창문을 조금 열어 놓아야 했고,

을 내놓은 채 나가다가 뒤미처 생각하고는 되돌아와 들여놓고

나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말 지독한 집착이었다.

 

며칠 후, 난초처럼 말이 없는 친구가 놀러 왔기에 선뜻 그의 품에

분을 안겨 주었다. 비로소 나는 얽매임에서 벗어난 것이다.

날아갈 듯 홀가분한 해방감. 3년 가까이 함께 지낸 '유정有情'을

떠나보냈는데도 서운하고 허전함보다 홀가분한 마음이 앞섰다.

이때부터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난을 통해 무소유無所有의 의미 같은 걸 터득하게 됐다고나 할까.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소유사所有史처럼 느껴진다.

보다 많은 자기네 몫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

소유욕에는 한정도 없고 휴일도 없다.

그저 하나라도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일념으로 출렁거리고 있다.

물건만으로는 성에 차질 않아 사람까지 소유하려 든다.

그 사람이 제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는 끔찍한 비극도 불사하면서.

제 정신도 갖지 못한 처지에 남을 가지려 하는 것이다.

 

소유욕은 이해와 정비례한다.

그것은 개인뿐 아니라 국가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어제의 맹방들이 오늘에는 맞서게 되는가 하면, 서로 으르렁대던

나라끼리 친선사절을 교환하는 사례를 우리는 얼마든지 보고 있다.

그것은 오로지 소유에 바탕을 둔 이해관계 때문이다. 만약 인간의

역사가 소유사에서 무소유사로 그 방향을 바꾼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싸우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주지 못해 싸운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간디는 또 이런 말도 하고 있다.

"내게는 소유가 범죄처럼 생각된다......"

그가 무엇인가를 갖는다면 같은 물건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이 똑같이

가질 수 있을 때 한한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므로

자기 소유에 대해서 범죄처럼 자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소유 관념이 때로는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한다.

그래서 자기의 분수까지도 돌볼 새 없이 들뜬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 한 번은 빈손으로 돌아갈 것이다.

내 이 육신마저 버리고 홀홀히 떠나갈 것이다.

하고 많은 물량일지라도 우리를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이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한번쯤 생각해볼 말씀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또다른 의미이다.

 

 

---무소유...(법정스님)--- 

 

 


 

 


 

 

사람아

무엇을 비웠느냐


사람마다 생각하는 대로 다 버릴 수 있고
사람마다 생각하는 대로 다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이 무슨 인생이라 말할 수 있겠느냐.

버릴 수 없는 것은
그 어느 것 하나 버리지 못하고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 하나 얻지 못하니
이것이 너와 내가 숨 헐떡이며
욕심 많은 우리네 인생들이
세상 살아가는 삶의 모습들이라 하지 않더냐.


사람들마다 말로는 수도 없이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버린다고들 하지만
정작 자신이 마음 속에 무엇을 비우고
무엇을 버려야만 하는지 알지 못하고
오히려 더 채우려 한단 말이더냐.

사람들마다 마음으로는
무엇이든 다 채우려고 하지만
정작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몸 밖에 보이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에게 유리한
허울좋고 게걸스런 탐욕뿐일진데.


사람아
그대가 버린 것이 무엇이며
얻는 것 또한 그 무엇이었단 말이더냐.

얻는 것이 비우는 것이요,
비우는 것이 얻는다 하였거늘
무엇을 얻기 위해 비운단 말이더냐.


사람이 사람으로서 가질 수 있는 것은
끈적거린 애착과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과
불만족스러운 무거운 삶뿐인 것을
비울 것이 무엇이며
담을 것 또한 무엇이라 하더냐.

어차피 이것도 저것도 다 무거운 짐인 걸.

 

 

 

 법정 스님

 

 


- 함께 있다는 것 -


사람은 저마다
업이 다르기 때문에
생각을 따로 해야 하고
행동도 같이 할 수 없다.

인연에 따라 모였다가
그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게 마련이다.

물론 인연의 주재자는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다

늘 함께 있고 싶은
희망사항이 지속되려면
서로를 들여다 보려고만 하는

시선을 같은 방향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서로 얽어매기 보다는
혼자 있게 할 일이다.

현악기 의 줄들이
한곡조 에 울리면서도
그 줄은 따로 이듯이

그런 떨어짐이
있어야 한다.

글/ 법정스님




( 무소유 " 법정스님 입적 " )

법정(法頂 1932년 ~ )은
대한민국의 불교 승려 수필가이다.
강원도 산골에 거주하고 있었다.

무소유의 정신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많은 저서를 통해
자신의 철학을 널리 알려왔다..

1954년 효봉 스님의 제자로 출가하였고
1970년대 후반 ..

법정(박재철) 승려,
수필가


생몰1932년 10월 8일 ~ 2010년 3월 11일

학력 해인사대교과
경력
1997년 대한불교조계종 길상사 스님
1994년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 회주
수상
2004년 제2회 대원상 대상
법정스님 추모서명 바로가기

 

 

 

 

 

 

 

 

 

  법정스님의 모습

 

무소유(無所有)

      모름지기 살아간다는 것은 가득 채워져 더 들어갈 수 없는 상태가 아니라 비워가며 닦는 맑음이다.

      비워 내지도 않고 담으려 하는 욕심 내 안엔 그 욕심이 너무 많아 이리 고생이다.

      언제면 내 가슴 속에 이웃에게 열어 보여도 부끄럽지 않은 수수한 마음이 들어와 앉아 둥지를 틀고,

      바싹 마른 참깨를 거꾸로 들고 털때 소소소소 쏟아지는 그런 소리 같은 가벼움이 자릴 잡아 평화로울가.

      늘 내 강물엔 파문이 일고 눈자국엔 물끼 어린 축축함으로 풀잎에 빗물 떨어지듯 초라하니

      그 위에 바스러지는 가녀린 상념은 지줄대는 산새의 목청으로도 어루만지고 달래주질 못하니

      한입 베어 먹었을때 소리 맑고 단맛 깊은 한겨울 무우 그 아삭거림 같은 맑음이 너무도 그립다.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이 곧 나다.

      육체 속에 영혼 속에 수줍은 듯 숨어 있는 것도 역시 나다.

      나를 다스리는 주인도 나를 구박하는 하인도 변함없는 나다.

      심금을 울리는 하나의 목소리 하나의 외침,외침들 그것도 역시 나다.

      나를 채찍질 하는 것도 나요 나를 헹구어 주는 것도 나다.

       

       

       

      바람은 그 소리를 남기지 않는다

       

       

      바람이  성긴 대숲에 불어와도
      바람이 지나가면
      그 소리를 남기지 않는다.
       
      기러기가 차가운 연못을 지나가도
      기러기가 지나가고 나면
      그 그림자를 남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군자(君子)는 일이 생기면
      비로소 마음이 나타나고
      일이 지나고 나면  마음도 따라서 비워진다

       

      사람들은 무엇이든 소유하기를 원한다.
      그들의 눈을 즐겁게 해 주는 것,
      그들의 귀를 즐겁게 해 주는 것,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 주는 것이면
      가리지 않고  자기 것으로 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남의 것이기보다는 우리 것으로,
      그리고  우리 것이기보다는 내 것이기를 바란다.

      나아가서는 내가 가진 것이 유일하기를 원한다.
      그들은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이기 위하여  
      소유하고 싶다고 거리낌 없이 말한다.

      얼마나 맹목적인 욕구이며  맹목적인 소유인가?
      보라! 
      모든 강물이 흘러 바다로 들어가 보이지 않듯이,
      사람들은 세월의 강물에 떠밀려 죽음이라는
      바다로  들어가 보이지 않게 된다.

      소유한다는 것은  머물러 있음을 의미한다.
      모든 사물이 어느 한 사람만의 소유가 아니었을 때
      그것은 살아 숨쉬며
      이 사람 혹은 저 사람과도 대화한다.

       


       

        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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