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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영상기획(07)] 사평역(沙平驛)에서 / 곽재구

구름에 달 가듯이 2011. 5. 3. 18:58

 


 

 

    사평역(沙平驛)에서 /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 ***********************************************
      [해설 : 정끝별,시인]
  • 조그만 간이역에 눈은 푹푹 내려 쌓이고, 푹푹 내려 쌓이는 눈 때문에 막차는 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대합실에서 오지 않는 막차를 기다리고 있다.
    부려둔 보따리나 꾸러미에 기대 누군가는 졸고, 누군가는 담배를 피우고,
    누군가는 웅크린 채 쿨럭이기도 한다.
    털모자에 잠바를 입은 사내는 간간이 난로에 톱밥을 던져 넣으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다.
    난로 위 주전자는 그렁그렁 끓는 소리를 내며 수증기를 내뿜고, 시계는 자정을 넘어서고….
  • 시대적 아픔을 서정적으로 그려냈다고 평가되는
    곽재구 시인의 데뷔작 '사평역에서'(1981)를 읽을 때마다 나는 울컥한다.
    아름다우면서 서럽고,
    힘들지만 따뜻했던 그때 그 시절의 풍경을 소중한 흑백사진처럼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에는 지난 시절의 희망과 절망이 눈보라로 흩날리고 있다,
    모래처럼 톱밥처럼. 그 울컥함이 소설(임철우 '사평역에서'),
    드라마(TV문학관 '사평역', '길 위의 날들'), 노래(김현성 '사평역에서')로 장르를 달리하며
    독자들의 공감을 얻게 했으리라.
  • 이십대에 쓴 시답게 감각과 묘사가 풋풋하다.
    깜깜한 유리창에 쌓였다 녹는 눈송이들은 흰 보라 수수꽃(라일락꽃)빛이다.
    사람들이 그믐처럼 졸고 있다는 표현은 절묘하다.
    확 타올랐다 사그라지는 난로 속 불빛은 톱밥을 던져 넣는 청색의 손바닥과 대조를 이룬다.
    간헐적으로 내뱉는 기침 소리는 '눈꽃의 화음'을 강조하고,
    뿌옇게 피어올랐다 사라지는 담배 연기는 회억(回憶)처럼 떠올랐다 가라앉곤 한다.
  • 한줌의 톱밥을 던지는 '나'는 무슨 사연을 간직한 걸까? 기다리는 막차는 올까?
    모든 역들은 어디론가 흘러가기 위한 지나감이고 경계이다.
    하여 모든 역들이 고향을 꿈꾸는 것이리라. 사평은 나주 근처에 있는 조그만 마을이다. 그
    사평에 사평역이 없다니, 그토록 울컥하게 했던 사평역이 어디에도 없다니,
    그래서 더욱 우리를 울컥하게 하는 것이겠지만.

 

 
출처 : 구름에 달 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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