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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영상기획(31)] 혼자 가는 먼 집/ 허수경

구름에 달 가듯이 2011. 5. 3. 19:07

 


 

 

혼자 가는 먼 집/ 허수경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                  

 

<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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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詩 감상: 정끝별.시인]

  • '그대'는 어떻게 '당신'이 되는가.
    허수경(44) 시인은 "그대라는 자연의 달이 나에게 기대 와 저를 부빌 때"라고 한다.
    '사내'가 아름다울 때, 그 아름다움에 기댈 수 있을 때 '당신'이 되기도 한다. 부빈다는 것, 기댄다는 것,
    그것은 다정(多情)이고 병(病)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병자처럼 당신을 묻은 마음의 무덤에 벌초하러 간다.
    사실은 슬픔으로 이어진 '살아옴의 상처'와,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을 추억하며 한 병의 맨 술을 마시는 중이리라.
    백수광부처럼 돌아올 수 없는 강을 훌쩍 건너가 버린 당신! 당신이 먼저 당도해버린 그곳은
    나 또한 혼자서 가야 할 먼 집이다. 그러니 남겨진 나는 참혹할밖에.

  • 참혹은 '당신'으로 상징되는 모든 것들이 불러일으키는 총체적 참혹이다.
    사랑을 떠나 보낸 실연의 참혹, 아버지를 여읜 망부의 참혹,
    신념을 잃은 한 시대의 참혹.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고 무를 수도 없는,
    죄다 마음에 묻어야 하는 당신들이다.
    그런 당신을 웃으면서 울면서 혹은 취해서 부르는 이 시의 언어는 언어 이전이거나 언어 이후다.
    단속적인 말줄임표와 쉼표, 어쩔 수 없이 새어 나오는 '킥킥'이라는 의성어에는,
    참혹인 줄 알면서도 참혹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자의 내면풍경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 나와 당신, 사랑의 마음과 마음의 무덤,
    환후와 치병이 '각각 따로'이기에, 당신과 함께했던 세월과 사랑과 상처와 그 상처의 몸이
  • 모두 적요이고 울음이다.
  • 그런 울음을 짊어지고 가는 시인, 세간의 혼몽을 잘 먹고 잘 노래하는 시인이야말로
    자신의 불우함을 다해 노래하는 시인의 지복(至福)일 터, 이 시는 그 지복의 한 자락을 걸쳐 입고 있다.

  • 허수경 시인은 울음 같은, 비명 같은,
    취생몽사 같은 시집 '혼자 가는 먼 집'을 낸 직후 독일로 휘리릭 날아가버렸다.
    1990년대 초반이었고, 시인의 생부가 돌아가시고 난 직후였다.
    동안(童顔)에, 대책 없는 맨몸이었다. 고고학을 공부한다 했다. 잘살고 있다고 했다.
    독일로 날아간 지 벌써 16년째다.
    당신… 당신이라는 말은 언제 불러도 참 좋다, 그리고 참 참혹하다, 킥킥 당신…. 

 

 
출처 : 구름에 달 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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