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강에
안개가
자욱 끼어 있다.
피안(彼岸)을 저어 가듯
태백(太白)의 허공속을
나룻배가 간다.
기슭, 백양목(白楊木) 가지에
까치가 한 마리
요란을 떨며 날은다.
물밑의 모래가
여인네의 속살처럼
맑아 온다.
잔 고기떼들이
생래(生來)의 즐거움으로
노닌다.
황금(黃金)의 햇발이 부서지며
꿈결의 꽃밭을 이룬다.
나도 이 속에선
밥 먹는 짐승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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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詩 감상: 정끝별·시인 ]
- 구상(1919~2004) 시인은 강과 물을 유난히 사랑했던 시인이다.
당호를 관수재(觀水齋)라 하고 서재에 '관수세심(觀水洗心)'이라는 편액을 걸어놓고는,
그 글귀대로 여의도 윤중제방에 나아가 유유히 흘러가는 한강을 바라보며 마음을 씻어내곤 했다.
수(水)와 심(心)은 통하는 글자이기에 관수(觀水)와 세심(洗心)은 '마음을 바라보는' 일인 바,
"마치 매일예배를 보듯/ 나는 오늘도 강에 나와 있"('겨울강 산조(散調)')곤 했던 것이리라. - 무릇 물은 맑다. 흐르면서 넓어지고, 끊이지 않고, 거슬러 오르지도 않는다.
무엇이든 그 밑바닥으로 흘러들고, 다른 무엇에 스며들었을 때에는 이미 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물이었다./ 맑은 물이었다./ 맑은 물이 하염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흘러가면서 항상 제자리에 있었다./ 제자리에 있으면서/ 순간마다 새로웠다.//
새로우면서 과거와/ 이어져 있었다."('그리스도 폴의 강 11'). 강에서
사람을 업어 건네는 수행을 통해 예수 발현(發顯)을 체험했던 성자 '그리스도 폴'의 강처럼,
시인에게 강은 건너가야 하는 삶의 터였으며 구도의 방편이자 사랑의 궁극이었을 것이다. - 흐르는 강물처럼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이기에, 오늘이 바로 영원이고 오늘 하루가 신비의 샘이다.
오늘 시방 그 영원을 살고 있기에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하고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하는('오늘') 것이리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꽃자리')인 것이리라.
그러니 내가 앉아 있는 지금-여기의 꽃자리가 '반갑고 고맙고 기쁠' 수밖에.
그는 격동의 현대사 속에서 파랑(波浪) 많은 삶을 살았지만
그의 시편들은 고요한 강물처럼 조용하고 편안하다. 진솔하고 정갈하다. 그의 삶도 시와 다르지 않았다. - 이 시는 아침 강의 신비와 신성을 노래하고 있다.
자욱한 아침 안개는
물과 하늘, 여기와 저기, 차안과 피안의 경계를 지운 채 세계를 하나의 '허공'으로 만들고 있다.
그 허공 속을 저어 가는 나룻배는 이미 비승비속(非僧非俗)이다.
구불구불 휜 흰 백양목 가지에 앉은 검은 까치 한 마리, 여인네 속살 같은 물밑의 모래,
생래의 즐거움으로 노니는 잔 고기떼,
동터오는 황금의 햇발은 인간이 침범하지 않는 태고(太古)적 아침 강의 이미지들이다.
이런 강을 마음에 품고 하루의 아침을 시작한다면,
매일 매일의 밥벌이 터에서도 '밥 먹는 짐승'으로 전락하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