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감상: 정끝별·시인]- 여름 여치가 운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달린다. 가을 정미소를 지난다.
차가운 (겨울) 구름이 떠있다. 그렇게 자전거는 골목 모퉁이를 돈다.
(아가였던) 할머니가 구멍가게 평상에 앉아 있다.
'잘 익은 사과'는 이런 일상적인 풍경을 다채로운 감각의 성찬으로 펼쳐놓고 있다. - 백 마리의 여치 울음 소리는 자전거의 바퀴 도는 소리, 정미소에서 나락 빻는 소리와 겹쳐진다.
처녀 엄마가 낳은 입양 가는 아가의 뺨은 구름의 차가움으로 전이되고,
그 구름은 천년 동안 아가인 그 사람의 냄새로 확장된다.
고향 마을은 금세 큰 사과로 축소되고,
마을을 달리는 자전거 바퀴는 사과를 깎는 칼날 소리를 낸다. 차르르차르르(사각사각)! - 자전거 바퀴가 둥글게 길을 깎아내고 그때마다 고향 마을만큼이나 큰 사과가 깎인다는 발상과
그 큰 사과를 노망든 할머니가 숟가락으로 파내 잇몸으로 오물오물 잡수신다는 발상은
사뭇 상징적이면서 동화적이다.
노망든 할머니가 숟가락으로 야금야금 파먹는 사과는
시간의 신(神)이 돌리는 물레의 실타래에 비견할 만하다.
기발하면서도 유쾌하다.
아가, 처녀 엄마, 할머니로 숨가쁘게 이동하는 시간을
'천년 동안 아가인 그 사람'으로 정지시켜 놓는 것도 흥미롭다. - 차르르차르르 돌던 한 세월이 발갛게 잘 익었겠다.
누군가 고향 마을에서 그 한 세월을 잘 놀다 갔겠다.
껍질이 홀라당 깎인 노르스름한 사과 속살 같았겠다. 군침 가득 돌았겠다.
그렇다면,
이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는 '밤낮을 만드시고 이 지구를 세세년년토록 운항하시는'
'숫자 나라의 시간 윤전기 노동자인 우리들 앞에서/ 감독을 게을리하신 적이 한 번도 없으신',
'세상의 모든 달력 공장 공장장님'을 낳은 바로 그 처녀 엄마 아니었을까. - 김혜순(52) 시인은 80년대를 대표하는 여성 시인이다.
그는 겹침의 시학을 즐겨 구사한다.
시간과 공간을 확장시키는가 하면 수축시키고, 감각과 시점을 겹쳐놓는가 하면 뚝 떨어뜨려 놓는다.
여성의 환상적 내면을 몸의 감각과 경험으로 그려냄으로써 일견 초현실주의적 색채를 떠올리게 한다.
그를 최근 유행하는 '환상시'의 대모라 불러도 무방하리라.
잘 익은 사과 / 김혜순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고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뺨보다 더 차가운 한 송이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내 손등을 덮어주고 가네요
그 작은 구름에게선 천 년 동안 아직도
아가인 그 사람의 냄새가 나네요
내 자전거 바퀴는 골목의 모퉁이를 만날 때마다
둥글게 둥글게 길을 깎아내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나 돌아온 고향 마을만큼
큰 사과가 소리없이 깎이고 있네요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
잇몸으로 오물오물 잘도 잡수시네요<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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