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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영상기획(94)] 가지가 담을 넘을 때/ 정끝별

구름에 달 가듯이 2011. 5. 4. 08:29

 


 

 

가지가 담을 넘을 때/ 정끝별

 

이를테면 수양의 늘어진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그건 수양 가지만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얼굴 한번 못 마주친 애먼 뿌리와
잠시 살 붙였다 적막히 손을 터는 꽃과 잎이
혼연일체 믿어주지 않았다면
가지 혼자서는 한없이 떨기만 했을 것이다

 

한 닷새 내리고 내리던 고집 센 비가 아니었으면
밤새 정분만 쌓던 도리 없는 폭설이 아니었으면
담을 넘는다는 게
가지에게는 그리 신명 나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지의 마음을 머뭇 세우고
담 밖을 가둬두는
저 금단의 담이 아니었으면
담의 몸을 가로지르고 담의 정수리를 타 넘어
담을 열 수 있다는 걸
수양의 늘어진 가지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목련 가지라든가 감나무 가지라든가
줄장미 줄기라든가 담쟁이 줄기라든가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가지에게 담은
무명에 획을 긋는
도박이자 도반이었을 것이다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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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詩감상:문태준·시인]
  • 정끝별(44) 시인의 시는 경쾌하다.
    언어에 용수철 같은 탄력이 있고 집중력 있게 나아간다.
    그녀의 시는 '불붙는 것'을 읽어내는 솜씨가 있다. 시적 대상이 갖고 있는 상반된 성격을
  • 동시에 읽어내는 놀라운 수품(手品).
    하나 속에 들어있는 상반된 성격의 팽팽한 대립을 말할 때 그녀의 시는 유니크(unique)하다.
    그녀의 시는 모임과 빠져나감, 격렬함과 멸렬함,
    달아남과 풀어줌 등 이 세상의 모든 시적 대상이 아마도 갖고 있을 상반된 두 성격,
  • 한데 엉킨 두 성격을 표현한다.
    해서 "세상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열망을 추슬러서 세상 안으로 돌아와 자리잡을 때
    정끝별의 시에는 물기가 번지고 리듬이 인다"(소설가 김훈의 말).

  • 이 시에서도 시인은 허공에 혹은 담장에 맞닥뜨린 가지의 엉킨 두 마음을 읽어낸다.
    사람에게도 그렇듯이 새로운 영역과 미래로의 진입을 위해 첫발을 떼는 순간은 두렵고
  • 떨리는 마음과 감행의 신명이 공존할 것이다.
    다만 가지가 담을 넘어서는 데에는 혼연일체의 믿음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
  • 그것을 범박하게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이 사랑의 배후로써 우리는 금단과 망설임과 삶의 궁기(窮氣)를 넘어선다.
    사랑 아니라면 어떻게 한낱 가지에 불과한 우리가 이 세상의 허공을,
    허공의 단단한 담을, 허공의 낙차 큰 절벽을 건너갈 수 있겠는가.

  • 정끝별 시인은 시 <나도 음악 소리를 낸다>에서 우리의 삶은 "조율되지 않은 건반
  • 몇 개로 지탱하고" 서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낡아가는 악기는 쉬지 않고 음악소리를 낸다. 나 딸 나 애인 나 아내 나 주부
  • 나 며느리 나 학생 나 선생 응 나는 엄마
    그리고 그리고 대대손손 아프디아픈 욕망의 음계, 전 생을 손가락에 실어 도레토 라시토 미미미".
    이 시에서처럼 그녀의 시는 삶의 상처를 솔직하게 드러내면서 그것을 딛고 나아간다.
    길의 상처를 받아들이면서 나아가는 타이어의 둥근 힘처럼.
    조율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도레토 라시토 미미미'가 없다면 우리 삶의 악보는 진혼곡 그 자체일 터.
    그녀의 시가 각별한 것은 '도레토 라시토 미미미'의 음계를 연주하는, 이 특별한 식미(食味)에 있다.

  • 바람을 표절하고, 싱싱한 아침 냄새를 표절하고,
    나무를 쪼는 딱따구리의 격렬한 사랑을 표절하는 '불굴의 표절작가'가 되고 싶다는 정끝별 시인.
    그녀의 시는 봄나물처럼 생기발랄하다. 부럽게 상큼한 맛으로 그녀의 시는 우리의 입맛까지 살려준다
    .

 

 
출처 : 구름에 달 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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