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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천 /천상병

구름에 달 가듯이 2011. 5. 19. 00:40

 
 
 


 

 

 

귀천

                      /천상병

 

나 하늘로돌아가리라

 

새벽빛 와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블어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가슴속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 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노인이 된 어느날의 내모습......

지금 노인으로 치매라는 놈하고 친구하는

내 어머님의 현재모습

 

나 어렸을적.... 십대후반이었을때

희망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엄두?도 내지 못하던 그시절

지금의 나는????

 

그모든것을 다 잊은듯이 있었지만,

내 의식 저 깊은곳에 숨어져 있던 어릴적 내모습......

집에오는길에 눈물이 많이났다.

 

현실속의 나는

지극히도 못된말을 수시로 입에 달고 산다

늙으면 죽어야해.... !!!

나는 일찍죽는게 절대적인 소원이야!!!!

더불어서 낮잠자듯이....

 

그 공연이 나를 참 복잡하게 한다~~..

 

아름다운 이세상 소풍 끝나는날..........

 

 

  • 1930년 1월 29일(양력) 일본 姬路市에서 2남 2녀중 차남으로 출생. 중학교 2학년 재학중 해방을 맞음
  • 1945년 일본에서 귀국, 마산에 정착함.
  • 1946년 마산 중학 3년에 편입함
  • 1949년 마산 중학 5년 재학 중 당시 담임 교사이던 김춘수 시인의 주선으로
  • 시<강물>이  <문예>지에 초회 추천됨.(추천 시인 유치환)
  • 1950년 미국 통역관으로 6개월간 근무
  • 1951년 전시중 부산에서 서울대 상과대학 입학, 송영택,김재섭 등과 함께
  • 동인지 < 처녀지>를 발간. <문예>지 평론 <나는 거부하고 저항할 것이다>
  • 를 전 재함으 로써 시와 평론활동을 함께 시작함.
  • 1952년 시 <갈매기>가 <문예>지에 게재되어 추천이 완료됨(추천 시인 모윤숙)
  • 1954년 서울대 상과대학 수료
  • 1956년 <현대문학>지에 월평 집필, 이후 외국서적을 다수 번역하기도 함
  • 1964년 김현옥 부산시장의 공보비서로 약 2년간 재직
  •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 약 6개월간 옥고를 치름
  • 1971년 고문의 후유증과 음주생활에서 오는 영양실조로 거리에서 쓰러짐
  • 행려병자로 서울 시립 정신병원에 입원됨
  • 유고시집 <새>가 발간됨. 이로써 살아있는 사람의 유고시집이
  • 발간되는 일화를  남기기도 함 
  • 1972년 친구 목순복의 누이동생인 목순옥과 결혼.
  • 1984년 시집 <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다>를 간행
  • 1985년 천상병 문학선집 <구름 손짓하며는>을 간행
  • 1987년 시집 <저승 가는데도 여비가 든다면>을 간행
  • 1988년 간경화증으로 춘천의료원에 입원함. 의사로부터 가망이 없다는
  • 진단을 통고  받았으나 기적적으로 회생
  • 1990년 시집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를 간행
  • 1993년 동화집 <나는 할아버지다 요놈들아>를 간행
  • 1993년 4월 28일 숙환으로 별세.

 

천상병 시인은 1993년 4월 28일 세상을 떠났는데, 그것은 오래 전에 예행 연습이 끝난 죽음이었다.

그가 처음 세상을 떠난 것은 1967년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서울 중심부에 있는 그들의 본부인 그 무시무시한 지하실로 끌고 갔을 때였다.
그는 거기서 물 고문, 성기에 전기 충격을 가하는 전기 고문을 받았다.

간첩 혐의로 기소된 대학 시절 친구의 수첩에서 그의 이름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천상병은 여섯 달을 갇혀 있다가 풀려 났다. 자백을 강요 받았으나 친구가 여럿 있다는 사실 말고는 자백할 것이 없었다. 이 때의 전기 고문으로 그는 자식을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었다.

1930년 일본 땅에서 태어난 그는 해방되던 해 가족을 따라 귀국하여 마산에서 학업을 계속하였다. 그가 아직 학생이었던 1949년 월간잡지 [문예]에 그의 첫 작품 "강물"이 발표되었다. 서울대학교에서 공부하던 1952년경에는 이미 추천이 완료되어 그는 기성 시인 대접을 받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그는 잠시 부산에서 일을 했는데 시를 쓰는 한편으로 문학 평론을 여러 잡지에 발표하기 시작하면서 평론 활동도 그의 작가로서의 생활에 중요한 일부분을 이룬다.

고문을 받은 사건이 있은 후 얼마 되지 않아서, 천상병은 또 한 번 "죽음"을 맞게 된다. 고문의 깊은 후유증에 시달리며 술타령으로 나날을 떠돌던 그가 마침내 1971년 실종된 것이다. 친구와 친척들은 백방으로 그를 찾아 보았지만 허사였다. 행려병자로 사망하여 아무도 모르는 어디엔가에 파 묻힌 것으로 결론을 내린 그들은, 비통한 심정으로 그의 작품들을 모아 유고 시집을 발간했다.

여러 차례의 죽음으로 점철된 것이 천상병 시인의 생애라면, 그의 삶은 또한 여러 겹의 부활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가 살아 있다는, 서울의 청량리 정신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느닷없는 소식이 왔다. 그는 거리에서 쓰러져 그 병원으로 이송되었는데, 그 때 그는 자신의 이름과 자신이 시인이었다는 사실말고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이 두 번째 기억이 그의 생명의 끈이었는지 모를 일이다.
심한 자폐증상을 보이는 가운데서도 대학 때 친구의 여동생인 목순옥의 방문을 받은 뒤로는 그의 병세가 호전되기 시작했다.
의사는 그녀에게 자주 찾아오는 것이 도움이 되며 모든 것이 잘 되면 한두 달 뒤에 퇴원할 수있을 거라고 말해 주었다. 그래서 목순옥은 오빠의 친구를 매일 방문하게 되었고, 마침내 사화로 복귀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다만 그에게는 스스로를 부양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는 철없는 어린애 같았고 어린애처럼 약했다. 천상병과 목순옥은 1972년 결혼을 하게 되고, 이들의 결혼 생활은 때로는 심한 고난과 어려움을 겪으며 20년간 계속 되었다.
친구들을 좋아하고 그냥 아무나 믿으며 술과 담배를 즐기는 그의 성품으로는 이 신혼부부의 의식주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목순옥은 서울 인사동 골목에 작은 찻집을 열었고, 예술인, 작가, 언론인, 지식인들이 단골 손님이 되었다. 천상병 초기 작품 중 하나의 제목을 따서 이 찻집의 옥호를 귀천(歸天)이라고 불렀다.  이들 부부는 서울 북쪽 교외로 나가 의정부에 있는 낡은 가옥의 작은 방에서 살림을 시작하였다.
술에 곯은 시인의 간장이 성할 리가 없었다. 1988년 목순옥은 의사로부터 남편의 시련이 막바지에 이르렀으며결코 회복할 가망이 없으니 불가피한 임종에 대비하라는 얘기를 들었다.
춘천에서 개업하고 있는 의사의 친구가 그들을 돕기로 했다. 천상병은 곧 입원했고 목순옥은 그 뒤 여러 달 동안 버스를 타고 춘천까지 달려가 매일 저녁을 그와 함께 보냈다. 그녀는 매일 춘천에서 돌아오는 길에 버스 안에서 이런 기도를 드렸다고 적고 있다. "하느님! 아직은 안됩니다. 그에게 오 년만 더 주십시오. 제발 빕니다. 오 년만 더요."
놀랍게도 그는 원기를 되찾았고 그 뒤 퇴원하여 그럭저럭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오 년 동안이었다. 이 유예의 기간 중에 그의 새로운 시집들과 에세이집들이 출간되었고, 1993년 월 28일 그는 마지막 귀천 길에 올랐다. 이제 인사동 찻집 문을 열어도 사람들은 늘 그가 앉던 자리에서 들려오던 시인의 꺼칠한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열 다섯 명만 들어와도 �차는 그곳이 만원일 때에도 그는 말했다. "어서 와요, 여기 자리 있어요, 여기요!"

천상병은 되살아나서 자신의 유고 시집의 출판을 목격하는 진귀한 특권을 누렸으며,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의 첫 유고 시집 이후에 몇 권의 시집을 더 출판할 수 있었다. 그의 두 번째 유고 시집, 이번에는 진짜인 유고 시집이 간행된 것은 1993년이었다.

 -한국문학 영역 총서2 천상병 "귀천" 中-

 

 

 

천상병 그는 나이 마흔둘이 되도록까지 결혼도 하지않고 또 이렇다 할 직업도 없이 인생활을 했고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이 그에게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았고 그야말로 동가식서가숙으로 살았다.
호주머니에 돈 한푼이 없어도 걱정을 하지않고 그저 만나는 선배나 친구에게 손을 내밀어 요새돈으로 돈백원 얻으면 그것으로 넉넉하게 생각한 사람. 그런 그가 바로 천상병이다.
좋다,좋다,참좋다 를 연발하며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자기라고 예쁜아내와 후덕한 장모님과 반갑의 담배, 한병의 맥주가 있는데 이 어찌 행복하지 않을쏘냐고 . . .  

그는 소풍가듯 하늘나라로 갔다. 저승가는데도 차비가 필요하다면 차비가 없어 저승도 못 가겠다고 걱정하던 그사람  이 세상 소풍 오듯 왔다가 소풍가듯 저 세상으로 떠난사람  평생을 가난했던 시인 그저 막걸리 한잔이면 인생의 자족을 알았던 시인 그는 진실로 天上의 시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가을은 다시 올 테지//다시 올까?/나와 네 외로운 마음이, /지금처럼/순하게 겹친 이 순간이…"       
속세에 전혀 물들지 않은 천상의 순수시인 천상병이 가을을 보내며 노래한 '들국화' 일부다.

산등성 외딴 곳 애기 들국화 빛깔과 파란 가을 하늘의 겹침을 보며 때묻지 않은 만남을 소망했다. 그만큼 가을은 번잡한 일상 속에 잊어버린 우리 마음을 찾아나서기에 좋은 계절이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천상병 '귀천 (歸天)' 단 한번 부산직할시 김현옥 시장의 공보실에 출근한 적이 있는 이 평생 무직의 시인 천상병 (千祥炳.1930~1993) 은 그 하루하루의 전설이 시를 압도하고 말았다.

천상병.. 그는 생을 마감하는 그 날까지.. 순수한 어린이었다..

이 시 `귀 천`에서도 보는 것과 같이 "아름다운 이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라는 시구는 감히 누구도 쉽게 적을 수 없는 것 아닌가.. "늙고, 초라한.. 하지만.. 누구보다도 순결한 영혼을 가진 천사.. 어찌 보면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강박하고, 깨끗치 못한 이 세상에 힘이 되어주라고 하늘에서 보낸 아기 천사 일런지도......

천재 천상병. 세상은, 세상의 악마들은 그를 짖밟고 짖밟고 짖밟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천진한 어린아이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하늘로 돌아가신 천상병님. 그리고 그분은 "이 세상 소풍은 아름다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시대의 마지막 기인, 마지막 떠돌이 천상병 시인, 폐품이 된 몸을 지탱하며, 뒤틀린 세상을 향해 막걸리를 뿌리며 퍼붓는 독설과 사랑과 눈물의 결정체가 내림 소주처럼 걸러져 맑게 빛나는 시로 순수하게 태어난다. 그러나 그저 맑은 순수시처럼 보이는 천상병 시인의 시에는 적당한 알콜도수가 감춰져 있어서무심코 읽는 순수한 독자들을 취하게 한다

 

 

이 세상 소풍을 끝내고 시인은 어디로 갔을까

천상병 시인은 지금, 여기 지상에는 없다. 어린애나 다름없게스리 천진무 구하게 살았고 또 순결무구한 시들만을 즐겨 썼던 그는, <귀천> 이란 시가 소원했듯이 지금은 하늘 나라에서 살고 있다.

그의 말마따나 긴 여행이 아닌 인생이란 잠깐 동안의 '소풍'을 끝내고 하늘로 올라가 지상에서 의 삶이 '아름다웠다'고 추억하는지 모른다. 살아 생전 그는 가난했다. 친지들한테는 '내미는 빈 손'밖에 없었다.

그것 도 큰 손이 아닌, 막걸리 몇 잔 정도일 뿐인 '작은 빈 손'만을 내밀었을 뿐이었다.

서울대 상대를 중퇴하여 지식인 계층에 속했으나 그의 몸과 시 세계는 영락없는 어린애였다. 시를 쓰는 일에 있어선 잔재주나 속이 빤히 보이는 언어적 테크닉은 과감하게 떨쳐 버렸다.
그의 시는 공자님이 말씀한 '사무사(思無邪 사악함이 없는)' 바로 그 길목 가운데에 놓인다.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나는 돈이 없어 저승도 못 가겠네"라고 노래했던 천상병 시인, 그의 시에는 정녕 꾸밈이 없다. 그의 마음(혹은 詩心)또한 꾸밈이 없다. 그의 시는 그가 사는 것만큼, 생각하는 대로 만큼 그대로 씌여졌을 뿐이다.

"하늘로 돌아가리라"로 시작되는 <귀천>이란 시는 그래서 쉽게(아, '쉽 다'란 말은 사실 얼마나 어려운 말린가!)씌어졌고 감동의 폭이 넓을 수밖 에 없다. 서울 인사동 골목을 가면, 시방 그의 아내가 찻집 '귀천'을 문 열어 놓고 있다. 하늘로 간 남편이 별 밝은 밤 더러는 종종 찾아 내려올지 몰라 서......

 『귀천』의 시인 천상병(1930~1993)은 술을 너무 좋아해 술을 친구 삼고, 세속의 관행을 무시한 기이한 행동으로 한평생을 살았지만 이 세상, 우리 세대 누구보다도 맑은 영혼의 소유지였다.

천상병의 고향은 마산시 진동면이다.고향의 생가는 오랜 세월의 탓인지 허물어지고 없으나 어린 천상병이 상상의 나래를 한 껏 펼친 던 상북초등학교는 아직까지 남아있다.  
도시 외곽에 있으면서도 전교생이 52명밖에 되지 않는 아담한 시골학교의 정경이 그대로 남아 있다. 천상병은 생전에 고향마을 정자 밑에 냇물이 흐르고, 거기서 멱감고 가재 잡던 이야기며, 또 7살 때 산에 갔다가 밭을 헛디뎌 벼랑으로 굴러 '이젠 죽었구나'하는데 다음 순간 몸이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더라느 이야기 등 고향에 대한 추억담을 털어 놓곤 했다.  

일제시대에 가족을 따라 일본에 갔다가 해방 후 귀국한 천상병은 마산에서 생활했다. 마산중학교 2학년으로 편입한 그는 내내 책 속에 파묻혀 살다시피 했다.
가난 때문에 책을 사볼 수 없었던 천상병은 학교와 집 중간에 있었던 서점에 매일같이 들러 책을 보고, 다 못 보면 페이지를 접어 두었다가 다음날 와서 계속 읽곤했다. 가끔은 서점주인이 책을 빌려주기도 했는데 천상병은 이를 평생동안 고마워 했다. 천상병은 마산중학교 시절 국어교사였던 시인 김춘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가끔 시를 지어 김춘수에게 보여주곤 했는데 마산고교 뒷산에 올라 지은 시 『강물』도 김춘수가 『문예』지에 근무하던 유치환에게 보내 추천됐다.  

그는 술을 좋아해 술에 얽힌 일화가 많다.

대학시절 소설가 한무숙의 집에 식객으로 있을 시절, 어느날 잠도 안 오고 술생각이 간절해 낮에 얼핏 본 안방 화장대 위의 양주병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모두가 잠든 사이 안방에 숨어들어 어둠 속에 어렴풋이 보이는 양주병을 들고 나와 단숨에 들이키고 보니 향수였다는 일화가 있다.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간의 옥고를 치른 후 천상병의 몸과 마음은 서서히 파괴되어 갔다. 한때 행방불명되어 그가 죽었다고 생각한 문우들은 80여 편의 시를 모아 유고시집 『새』를 내었다. 살아있는 사람을 두고 유고 시집이 나오는 해프닝이 벌어진 것이다.
1993년 4월 28일 그는 이 세상 소풍을 끝내고 하늘로 돌아갔다.  소설가 천승세의 말처럼 평생 평화만을 쪼던 새가 하늘로 날아간 것이다.

시집 『새』,『귀천』,『주막에서』 등과 산문집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