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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지폐의 역사

구름에 달 가듯이 2007. 10. 31. 14:17
고종 13년(1876), 일본과의 병자수호조약에 따라 인천, 부산, 원산항 개항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해관(海關)업무를 취급하여오던 일본 제일은행은 1901년 해관세를 저당하는 댓가로 은행권 발행권을 확득하고자 하였으나 우리 정부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일원권 1902

오원권 1902

십원권 1902
그러자 같은해 10월 무역촉진과 해관세 출납을 원활히 하는데 필요하다는 이유로 일본 대장성에 발행허가를 신청하였으며, 이에 일본정부는 제일은행에 은행권 발행을 허가하는 특별규정을 제정하였다.
광무 6년(1902). 제일은행은 일원권, 오원권, 십원권을 발행하였으며 1904년 일원권, 오원권, 십원권등 구권 3권종을 1908년에는 신권 3권종 등 모두 12권종을 발행하기에 이르렀다.

일원권 1904

오원권 1904

십원권 1904

제일 은행권이 발행되자 일부지역에서는 그 미려함과 유통 편의성이 인정되어 그 유통량이 증가되었으나 우리나라 정부요인이나 재야 지식인들은 이 은행이 일본의 조선에 대한 화폐 침략의 선봉에 서게 되었다고 인식하고 제일은행권 유통배척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개항과 함께 진출한 일본 은행과 일본 화폐의 국내 유통으로 인하여 당시 우리나라 화폐질서는 동요되기 시작하였으며 또한 개항에 따른 제 행정비의 가중으로 인한 재정난과 그에 따른 화폐남발은 조선 화폐 제도를 더욱 문란하게 만든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은 또한 근대적 화폐금융제도를 도입하고 이를 확립하고자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일본 대장성은 군대의 수요에 부응할 수 있도록 소액은행권의 발행을 제일은행에 지시하였고 동 지시에 따라 군대에 대한 일본은행. 태환권 인환용(兌換券 引換用)으로 오십전, 이십전, 십전의 소액은행권을 1904년 6월부터 발행하였다. 이 소액은행권은 봉황과 용이 주소재로 들어가 있으며, 모조지를 사용하여 철판(凸版) 인쇄하였다. 이와같이 일본 제일은행이 러·일 전쟁때 군용화폐로 발행한 오십전, 이십전, 십전의 소액은행권은 일본정부가 발행한 금속 보조 화폐와 함께 유통 되었으나, 1911년 3월 31일 조선총독부는 "고시 제8호"로 일원 미만의 은행권 발행을 금지하고 이미 발행되었던 소액은행권은 1912년 3월 31일자로 그 유통을 금지 하였다

십전권 1904.6

이십전권 1904.6

오십전권 1904.6

오원권(미발행)

일본제일은행은 1902년및 1904년에 발행한 은행권의 주소재인 제일은행장 초상을 변경하고 새로운 소재를 담은 은행권을 발행하였다. 신권을 보면 1908년 8월 1일 발행된 일원권은 화홍문(華虹門)이, 이듬해 1월 1일 발행된 십원권은 주합루(宙合樓)가, 이어 7월 1일 발행된 오원권은 광화문이 주소재로 사용되었다. 이들 일본 제일은행권은 요판 인쇄 방법을 사용하였는데 구권은 대장성인쇄국에서, 신권은 내각인쇄국에서 제조되었다. 구권은 각 권종 모두 종이에 "제일은행"의 은서(빛에 비추어 나타나는 숨은 글자)를 넣어 제조하였고, 신권의 경우는 십원권은 태극장(太極章)과 벚꽃, 오원권은 국화, 당초(唐草)와 이화장(李花章), 일원권은 태극장과 이화장이 은화(빛에 비추어 나타나는 숨은 그림)로 들어갔다.

일원권 1908.8

오원권 1909.7

십원권 1909.1
융희 3년(1909) 6월 한·일 정부간에 제일은행권의 권리 의무 계승에 관한 각서를 교환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중앙은행이 발족되면서 우리나라 법화인 한국은행권을 독점적으로 발행하도록 하고 한국은행권 제조를 일본 대장성 인쇄국에 발주하였다. 제일 은행권의 원판(原版)을 일부 수정하여 전용한 것으로서 명칭, 행장, 근거등에 약간 변경을 가한 「구한국 은행권」은 한일합방 직후인 1910년 12월 일원권과 이듬해 8월 오원권, 십원권 등 3 권종이 발행되었다.


일원권 1910.12.21

오원권 1911.8.1

십원권 1911.8.1
1911년 3월 조선은행법이 공포되어 그해 8월 15일 부터 시행됨에 따라 (구), 한국은행은 조선은행으로 개칭되었다. 당시 은행권의 발행준비가 불충분하여 편의적으로 일본제일은행권 및 (구)한국은행권을 조선은행권으로 간주 유통시키고 은행권의 제조를 일본의 내각 인쇄국에 발주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자 조선 총독부 인쇄국에 은행권제조를 의뢰하여 1914년 9월 1일 비로소 "조선은행" 기명의 100원권이 발행되었다.
일원권 1915.1.4
백원권 1914.9.1
이처럼 저액권보다 먼저 고액권부터 발행된 것은 일원, 오원, 십원의 경우는 (구)한국은행권 및 일본제일 은행권을 사용할 수 있었으며 또한 유럽에서는 이미 제 1 차 세계대전이 발발되어 이로 말미암아 세계적인 "인플레이션"현상 이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어 고액권 발행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을 것 으로 추측된다. 백원권이 발행된 이듬해인 1915년 1월 4일 일원권이 발행되고 같은해 11월 1일에는 오원권 및 십원권이 각각 발행됨으로서 (구)한국은행권과 일본은행권의 회수를 촉진하게 되었다.
오원권 1915.1
십원권 1915.11.1

당초 조선은행권은 주로 조선총독부 직영의 공장에서 제조되었으나, 일부는 대장성 인쇄국에서 일본은행권과 같이 제조된 것도 있어 신양식의 4권종에는 조선총독부 제조의 것과 일본 내각인쇄국 제조의 것이 있다. 표면 하부에 전자는 "조선총독부인쇄" 후자는 "대일본 제국 정부 내각 인쇄국 제조"라는 명판을 넣었고 기호의 괄호 모양도 조선총독부는<> 일본 내각인쇄국은 { }로 표시하였으며 "아라비아"숫자 자형도 상이하였다. 그리고 각은행권의 도안을 보면 백원권에는 대흑천상(大黑天像)으로 이는 일본은행 최초의 구 백원권에 있었던 것이며 다른 권종에는 나이 많은 노인상을 공통적으로 게재하고 있었다.

100원권에 있는 대흑천상은 본래 불교에서 삼보(불·법·승)를 옹호하고 먹을 것을 넉넉하게 한다는 신으로서 뒤에는 복의 신으로 부엌에 모시게 되었다. 그리고 노인은 조선말기의 인물로서 운양 김윤식(1835~1922)의 초상으로 1874년 문과에 급제 하여 외무대신, 대제학을 거쳐 3·1운동 이후에는 독립운동에도 가담하는 등 구한말의 이름높은 석학이자 문장가로서 87세까지 장수하였으며 저서로는 「운양집(雲養集)」,「천진담초(天津談草)」,「음청사(陰晴史)」등이 있다.


백원권 1914.9.1
오원권 1915.11.1

일원권 1915.1.4
십원권 1915.11.1

1932년 1월 4일 조선은행은 일본 내각인쇄국이 제조한 개(改) 일원권을 발행하였다. 이어 그해 6월 1일에는 개(改) 십원권이 발행되었는데 표면에는 중앙의 이화(李花)와 무궁화가 겹쳐서 인쇄되었으며, 개(改) 일원권에서 삭제되었던 조선은행의 휘장이 다시 부활되었다. 또한 1932년 9월 일본이 만주사변을 도발시켜 전쟁 분위기가 고조됨에 따라 우리나라도 그 영향권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후 1935 년 6월 1일 개(改) 오원권이 발행되었다. 이것은 일본내각인쇄국에서 제조된 것으로 앞면에는 발행근거를 삭제하고 뒷면은 조선은행 휘장을 삽입하였으며 지불문언이 없어져 간소화 되었다. 1937년에 들어와서는 전쟁 징후가 더욱 농후해졌고 또한 중일전쟁을 계기로 전쟁 물자기 동원됨에 따라 인쇄지를 비롯한 은행권 인쇄재료도 간소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러므로 1938년 12월 1일에 발행한 개(改) 백원권도 품질이 뒤떨어진 조잡한 은행권이 되었다.
개(改) 일원권 1932.1.4
개(改)십원권 1932.6.1
개(改) 오원권 1935.6.1
개(改) 백원권 1938.12.1

전시체제에서의 조선은행권은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물자의 부족으로 인하여 될 수 있는대로 인쇄를 간소화하고 또 저급화하였기 때문에 그 품질이 떨어져 조잡한 은행권이 발행되었다. 1944년 2월 1일에는 갑(甲) 십원권과 갑(甲) 오원권, 10월 15일에는 개(改) 일원권(무번호권(無番號券)), 11월 1일에는 갑(甲) 백원권, 11월 15일에는 갑(甲) 십원권(무번호권(無番號券))이 발행되어 한해동안에 5권종이 신규발행되었다.

당시 발행된 조선은행권 갑권(甲券)과 중일전쟁 이전에 발행된 개 1, 5, 10원권 및 중일전쟁 직후에 발행된 개(改) 백원권을 비교하여 보면 조선은행권 갑권은 뒷면인쇄를 요판(凹版)인쇄에서 철판(凸版)인쇄로 대체하고 인쇄도수(度數)도 1도씩 줄였으며, 은행권의 크기 및 주소재 등이 개권(改券)과 별로 달라진 점이 없이 종래의 은행권 앞면에 기재된 교환문구만 바뀌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듬해인 1945년 2월 15일 발행한 갑(甲) 오원권(무번호권)은 전시금융체제 하에서의 마지막 은행권이 되었다.
갑(甲) 십원권 1944.2.1
갑(甲) 오원권 1944.2.1
갑(甲) 일원권(무번호) 1944.10.15
갑(甲) 백원권 1944.11.1
갑(甲) 십원권(무번호) 1944.11.15
갑(甲) 오원권(무번호) 1945.2.15

1944년 말까지 조선은행권은 대부분 일본 대장성인쇄국에서 제조되었으나 전세(戰勢) 악화로 일본의 해상보급로가 차단되어 물자수송이 어려워짐에 따라 은행권 제조 공급에 대한 대책이 요구되었으며 현지 제조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마련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조선은행은 긴박한 전쟁으로 많은 예금 인출과 전비조달을 위한 은행권 증발에 따른 은행권 비축이 시급하였는데 당시 대장성 인쇄국에서는 제조능력의 한계점에 달하였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현지 제조계획이 착수되어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에서 모조지를 사용하여 갑(甲) 천원권 70억원을 제조하였다. 그러나 갑(甲) 천원권은 심리적으로 "인플레시션"을 조장한다하여 결국 발행되지 못하였다.
갑(甲) 천원권(미발행)
조선은행권은 전시경제 체제가 계속됨에 따라 점차 은행권 발행이 증가되었으며 특히 1941년 발권제도가 최고 발행액 제한제도로 변경된 이후 급등하여 1945년 8월 14일에는 중일(中日)전쟁 발발 직후인 1937년보다 약 17배 증가한 48억 4천만원에 달하였다. 그리고 일본이 중국을 침략한 이후 조선은행의 중국진출로 인한 영업지역의 확대 등으로 우리나라 밖에서의 발행액이 점차 증가하여 1937년 말 조선은행권 발행액의 31%를 점유하였다. 1945년 말에는 40%에 달해 조선은행권이 중국지역에 널리 유통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종전이 임박하여서는 전비 조달을 위한 통화 증발로 화폐유통액이 1944년 말에는 31억 4천만원에 달하였고 종전후에도 증가세를 지속하여 1945년 말에는 87억 6천만원에 이르렀다.
제 2차 세계대전의 종전(終轉)은 우리에게 해방의 기쁘을 가져다 주었나, 곧 외세에 의하여남과 북으로 국토의 분단을 가져왔다. 1945년 8월 15일 부터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에는 군정 및 과도 정부를 통하여 정치적 불안이 계속되는 한편, 경제적으로는 일본 경제와의 급격한 단절, 국토의 양단으로 인한 생산시설 및 지하 자원의 북한 편재등으로 말미암은 생산 위축과 산업구조의 불균형 심화되었다.
해방 직후부터 일본인에 의한 고의적 화폐 남발및 적자재정 등으로 인하여 누적되기 시작한 악성 인플레이션 등이 한국 경제의 재건과 발전을 암담하게 하였다.
사회적으로는 생산위축과 해외 귀환 동포의 격증 등으로 유발된 실업자의 증가. 사상대립으로 인한 사회적 불안등이 중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여건하에 해방직후의 한국경제는 심각한 혼란에 빠져 그 재건과 발전이 매우 어려운 상태에 있었다.
1945년 해방후에도 군정법령에 의하여 조선은행법이 존속하게 되고 이에 따라 조선은행권도 계속 유통되었다. 조선은행권은 해방후의 급격한 통화 팽창으로 중심권종이 저액권으로부터 100원권으로 곧 이행되었으며, 조선서적 인쇄주식회사에서 인쇄된 은행권이 발행되기 시작하였다. 1945년 8월에 을(乙) 100원권이 최초로 발행되었고, 뒤이어 10월 20일에는 을(乙) 1원권, 12월 10일에는 병(丙)100원권과 을(乙) 10원권이 각각 발행되어 그후 모든 은행권 인쇄는 조선서적 인쇄주식회사가 전담하였다.
을(乙) 백원권 1945.8.15
을(乙) 일원권 1945.10.20
병(丙) 백원권 1945.12.10
을(乙) 십원권 1945.12.10
은행 내각인쇄국에서 인쇄하던 조선은행권은 제2차 세계대전 등으로 일본에서 제조할 여건이 되지 못하여 광복 직전부터는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에서 인쇄되었다. 조선은행은 비상사태에 대비하여 100원권 21억원, 1,000원권 70억원 합계 91억원을 조선서적인쇄 주식회사에서 인쇄하였는데, 제조된 은행권은 "옵셋" 인쇄로서 전쟁말기의 물자부족사태로 인하여 지폐전용지가 사용되지 못하고 서울시내에서 구입된 모조지가 사용되었다.

그런데 광복후 일본의 전신 인출금 및 귀국비용 등으로 21 억원을 100원권만으로는 도저히 화폐수요를 감당할 수 없어 당시 일인들은 1,000원권 발행을 획책하였으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화폐의 증발을 우려하여 이를 강력히 반대하여 일인들은 해방전 조선서적주식회사에서 사용하던 100원권 원판을 가져다가 일본인이 경영하던 근택(近澤)인쇄소에서 8월 하순부터 9월초까지 약 15일간 조선은행권을 제조하였다. 이렇게 하여 조선은행권 을(乙) 백원권은 조선서적 인쇄주식회사와 근택인쇄소에서 제조된 것으로서 광복과 더불어 발행된 것이다.
1946년도에 들어서는 군정청 대상금의 방출이 본격화되고 그해 7월부터는 농산물 공출제도의 부활에 따른 양곡수매자금의 방출 등으로 7월말 화폐발행고는 현저한 증가추세를 나타내고 있으며 더우기 공공요금의 대폭적 인상 등 으로 화폐는 계속 증가되어 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그해 5월 6일 병(丙) 십원권을 발행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발행한 조선은행권은 일제시대의 도안 그대로 인쇄된 것이므로 은행권에서의 일본색 제거를 목적으로 종래 일본정부 휘장인 오동문장을 무궁화로 도안을 변경하여 7월 1일 정(丁) 백원권, 10월 10일에는 정(丁) 십원권을 발행하였으며, 이듬해인 47년 6월 3일에는 무(戊) 백원권을 발행함으로써 은행권의 일부쇄신을 가져왔다.
병(丙) 십원권 1946.5.6
정(丁) 백원권 1946.7.1
정(丁) 십원권 1946.10.10
무(戊) 백원권 1947.6.3
6.25사변중 공산군은 침범지역내에서 불법 남발한 지폐를 강제 유통시킴은 물론 공작 자금으로 사용 함으로서 경제질서의 파괴를 획책하였다. 정부는 피침지역에서 불법남발한 적성 통화(敵性 通貨)의 유통을 막고 경제 교란 행위를 봉쇄하기 위하여 1950년 8월 28일 조선은행권을 한국은행권으로 교환하는 제 1 차 통화 조치를 단행하였다. 1953년 1월 16일 제1차 통화조치가 완결되는 기간중인 1951년 10월 한국조폐공사법의 발효와 더불어 1952년 10월 신 1,000원권과 500원권을 인쇄하게 됨으로서 조폐기관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어 그후부터는 은행권 인쇄를 모두 한국조폐공사가 전담하게 되었다.
백원권 1950.7.22
천원권 1950.7.22
오백원권 1952.10.10
신 천원권 1952.10.10

전란으로 인한 막대한 전비지출과 생산활동의 위축, 통화의 대외가치 폭락으로 정상적인 무역 불균형 등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을 수습하고 금융, 생산활동을 안정된 통화의 터전에 올려 놓기 위하여 정부는 1953년 2월 원화에서 환화로 개칭 100대 1의 평가절하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제2차 통화조치를 단행하였다. 미국 연방 인쇄국에서 제조된 이 은행권은 평판 인쇄된 것이었으나 광복후 이 당시까지 발행된 어떤 은행권보다 고급종이를 사용한 뛰어난 화폐였다. 즉 형광물질을 넣어 자외선을 비추면 바탕이나 번호 색상이 바뀌며, 색사(色絲)를 넣어 위조가 어렵게 특수 제조된 것이었다.
십환권 1953.2.17
백환권 1953.2.17
천환권 1953.2.17
일환권 1953.2.17
오환권 1953.2.17

한국은행은 1953년 통화개혁시 미국에서 제조반입하여 발행한 은행권을 국내 제조권으로 대체하기 위하여 1953년 3월 17일에 신 십환권, 같은 해 1953년 12월 18일 신 백환권을 각각 발행하였다. 발행초기에는 신 십환권및 신 백환권 모두 황색 조폐지를 사용하여 발행하였으나 신 십환권은 1953년 12월 15일 부터 신 백환권은 이듬해 2월 1일부터 각각 백색 용지로 바꾸어 발행하였다.
신 십환권(황색지) 1953.3.17
신 백환권(황색지) 1953.12.18
신 십환권(백색지) 1953.12.15
신 백환권(백색지) 1954.2.1

1956년 3월 새로운 액면의 은행권 발행이 이루어져 도안을 약간 변경한 오백환권을 발행하였다. 1957년 3월에는 신 천환권을 발행하므로서 소액 은행권 오환권 및 일환권을 제외하고는 미국제조 은행권을 모두 국내 제조권으로 대체하게 되었다. 1953년 2차 통화조치에 의해 환 은행권이 발행된 이후 1958년까지 발행된 신종 은행권은 9 권종에 달하였으며 특이한것은 이중 오십환권 및 신 십환권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승만 대통령의 초상을 앞면 도안으로 채택한 것이었다.
오백환권 1956.3.26
(외산용지) 신 천환권 1957.3.26
(국산용지) 신 천환권 1957.3.26
개 백환권 1957.3.26
신 오백환권 1958.8.15
오십환권 1958.8.15

1960년 4.19혁명으로 경제의 안정성장을 이룩하기 위한 제반 경제현실화 정책이 실시되자 한국은행은 새로운 경제질서확립을 상징하 는 뜻에서 새로운 도안의 은행권을 발행하였다. 먼저 1960년 8 월 15 일 종전 신 천환권의 도안을 세종대왕으로 변경한 개 천환권을 발행하였고 이어 1961년 4 월 19일에는 역시 세종대왕을 도안으로 한 개 오백환권을 발행하였다.
개 천환권 1960.8.15
개 오백환권 1961.4.19
개 갑백한권 1962.5.16
8.15 해방이후 혼란기의 악성 인플레이션과 냉전체제의 대결로 폭발한 6.25동란으로 굶주림과 폐허 그리고 구정권의 부정과 부패, 무능 등으로 국민경제가 도탄에 빠졌으며, 무기력과 체념이 지배하던 국민의식이 1960년대 부터 점차 확사된 국민의식의 변화와 경제개발 정책이 가속화 되면서 신생 산업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리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등 모든 분야에서도 괄목할만한 성장을 가져왔으며, 더욱 번영되고 희망찬 미래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정부는 국민경제의 건전한 질서를 확립하고 경제개발 5 개년 계획 수행상의 애로를 제거하기 위하여 1962년 6 월 화폐단위를 환으로부터 원으로 개칭하며 환가 비율을 10분의 1로 절하하는 제 3 차 긴급통화조치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3차 통화조치는 경제적으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단순히 화폐의 명목 가치를 절하하는데 그쳤으며, 화폐사적 측면에서는 현용 원화 체계의 도입이라는 의의를 가졌다고 하겠다. 그리고 3차 통화조치에 의해 발행된 은행권은 영국 THOMAS DE LA RUE CO.에서 제조 반입하여 발행한 것으로서 오백원권 , 백원권 및 오십원권을 제외하고는 모두 평판인쇄 방식에 의해 제조된 것으로 비교적 위조가 용이하여 인쇄방법의 개선이 시급한 문제점으로 대두되었다.
가 오백원권 1962.6.10
가 백원권 1962.6.10
가 오십원권 1962.6.10
가 십원권 1962.6.10
오원권 1962.6.10
일원권 1962.6.10
1962년 9월 2 일 한국은행은 영국제조권의 국내제조권 대체를 위하여 나 십원권을 발행하였고 같은 해 11월 1 일에는 나 백원권을 발행하였다. 나 백원권은 종전의 백원권과 같은 규격으로 앞면 도안도 독립문을 그대로 사용하였으나 십원권은 소액거래의 중심권종인 십원권의 품위향상을 위하여 규격을 크게 하는 한편 도안에 있어서도 앞면에 첨성대를 사용하여 한국은행 휘장외에는 뚜렷한 도안소재 가 없었던 제 3 차 긴급통화조치로 발행한 십원권에 비하여 다양하게 하였다. 이어 1962년 12월 1일 소액거래에 있어서 단수(端數)처리의 편의를 위하여 오십전권과 십전권을 발행하였는데 이로써 원화은행권의 권종체계는 8개권종으로 정비되어 통화조치 이전의 환화은행권 7개권종에 각권종은 물론 새로운 고액권으로서 오백원권을 갖게 되었다.
나 백원권 1962.11.1
나 십원권 1962.9.21
오십전권 1962.12.1
십전권 1962.12.1
1965년 한국조폐공사가 새로운 시설을 도입하므로서 요판(凹板)인쇄가 가능하여지자 한국은행은 요판인쇄권의 발행을 추진하였는데 먼저 1965년 8월 14일에는 다 백원권을 발행하고 1966년 8 월 16일에는 나 오백원권을 발행하였다. 다 백원권은 국내 제조된 최초의 요판인쇄권으로 도안의 정교화를 기하고자 앞면도안의 소재를 나 백원권 독립문에서 세종대왕 초상으로 변경하였다. 인쇄방법에 있어서 다 백원권은 앞면만 요판 인쇄하였으나, 나오백원권은 앞뒤 양면에 요판 인쇄하였다. 이어 1969년 3월 21일 한국은행은 오십원권의 도안을 다소 변경한 나 오십원권을 발행하였다. 나 오십원권은 소액권종임을 감안하여 평판인쇄방식에 의해 제조하였는데 이로써 1962년 통화개혁으로 발행된 영국제조권 6 개권종중 주화로 대체된 5 원권 및 1원권을 제외하고는 모두 국내제조권으로 대체되었다.
다 백원권 1965.8.14
나 오백원권 1966.8.16
나 오십원권 1969.3.21
1970연대에 들어서 급속한 경제개발에 따른 거래규모의 확대와 물가상승으로 고액화폐에 대한 수요가 증대 하게 되자 10,000원권및 5,000원권 고액은행권의 발행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72년 7 월 1 일 오천원권이 발행되었으며 1973년 6 월 12일 만원권을 발행하였다. 오천원권및 만원권은 최고액권이던 500원권에 비하여 액면이 크게 높아지고 위조 방지와 은행권 품질향상을 위하여 한국은행권으로서는 최초로 오천원권은 앞면도안과 같은 율곡 이이의 초상은화(隱畵)를 만원권은 석굴암 보살상은화(隱畵)를 각각 앞면 좌단에 삽입하였다. 1973년 9 월 1 일 새로운 도안의 다 오백원권을 발행하였는데 다 오백원권은 종전 나 오백원권의 전면이 흑색계통으로 되어 있어 사진복사 위변조가 비교적 용이하였던 점을 감안하여 색상을 가급적 다색도로 하는 한편 「한국은행」문자를 부정위치은화로 투입하였다.
가 오천원권 1972.7.1
가 만원권 1973.6.12
다 오백원권 1973.9.1
한국은행은 고액권용지의 국산화와 표준영정도안의 채택을 위하여 1977년 6 월 1일에 나 오천원권 1979년 6월 15일에 나 만원권을 각각 발행하였다. 종래의 가 오천원권 및 가 만원권 등 고액권은 영국산 수입용지를 사용하였으나 은화용지의 국내생산이 가능하게됨에 따라 은행권용지를 국산화하는 한편 이를 계기로 도안의 표준영정채택을 추진하였다. 표준영정문제는 선현의 동상이나 영정을 제작함에 있어 제작처에 따라 그 모습이 상이하게 되어 물의를 빚는 사례를 방지하기 위하여 1973 년부터 영정제작시에는 정부의 사전 심의조정을 받아 제작하도록 하였다. 화폐도안에 사용된 선현의 초상중 다 오백원권 및 천원권의 도안은 정부의 심의를 거쳐 제작한 것이었으나 가 오천원권 및 가 만원권의 경우 표준영정 심의이전에 이미 제작되어 이의 표준영정 대체를 추진하게 된 것이다.
가 천원권 1975.8.14
나 오천원권 1977.6.1
나 만원권 1979.6.15
한국은행은 정부의 승인하에 1982년 1월 화폐체계정비계획을 수립 현용화폐의 규격과 도안을 전면적으로 조정한 새로운 은행권 및 주화를 발행하였다. 향후, 현금자동인출기, 자동정사기 등 자동화에 대비하여 위·변조화폐 감별을 위한 특수화학, 기계감응요소를 강화하고 특히 액면을 표시하는 점자를 첨가하여 맹인의 권종구분이 용이하도록 하였으며, 인쇄 적합도등 지질향상을 도모하고 용지의 강도를 강화하여 선진국 수준으로 화폐의 품질을 높였다. 주화에 있어서는 500원 은행권을 대체하여 500원화를 발행함으로써 자동 판매기 보급등에 따른 고액주화 수요에 부응하여 현재 화종별로 다소 불일치 되어있는 문자 및 숫자의 배열 등 주화 도안의 통일성을 도모하였다.
나 천원권 1983.6.11
다 오천원권 1983.6.11
다 만원권 1983.10.8

은행권의 디자인은 주제, 색상, 문양으로 구성되며 문화와 전통 등 국가의 특성을 살릴 수 있는 도안으로 디자인되므로 화폐는 곧 그 나라의 얼굴이고, 국민정서의 표상이며, 문화수준의 척도라 할 수 있다.

만원권 - 세종대왕, 경회루, 물시계

오천원권- 이이,오죽헌

나 천원권 - 이황,도산서원

 

다 오백원권 - 이순신,거북선


가 오천원권 - 한국은행

가 천원권 - 무궁화

나 오백원권 - 남대문


나 백원권- 독립문


나 오십원권- 탑골공원

출처 : 산본 |글쓴이 : 모란 [원문보기]
출처 : 인생살이 쉼터
글쓴이 : 윤삿갓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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