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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ael Jackson ... 2

구름에 달 가듯이 2011. 5. 25. 15:56

Michael Jackson - Beat It
 
 
 
 
:::::  Michael Jackson  :::::
 
 ▣ 본명 : 마이클 조 잭슨
         (Michael Joe Jackson)
생년월일 : 1958년 8월 29일
고향 : 미국 인디애나주 게리시
가족 : 조잭슨과 캐더린 잭슨
    부부의 9남매 중 다섯 번째
소속 레이블 : 소니뮤직
홈페이지 : www.mjnet.com
발표 앨범 : Off The Wall
      (1979년), Thriller(1982년)
      Bad (1987년), Dangerous
      (1991년), HiStory (1995년)
      Blood on The Dance Floor
      - HiStory in the Mix 등
     수없이 많음.
 
'팝의 황제' 마이클잭슨!
무엇이 오늘의 그를 있게 한 것인가?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부모의 힘이다. 클라리넷 연주가였던 어머니와 기타리스트로 활동했던 아버지는 일찍부터 아이들에게 악기를 한가지씩 배우게 했으며, 레이 찰스에서부터 비틀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레퍼토리를 섭렵하도록 했다. 이렇게 일찍부터 어린 마이클의 재능을 간파해 잭슨 파이브를 결성시킨 아버지 못지않게 '황금의 손'으로 불리는 퀸시 존스 또한 오늘의 마이클 잭슨을 있게 한 중요한 인물이다.
   마이클 잭슨은 1958년 8월 29일 미국 북부 지역인 인디애나주 게리시에서 9남매의 다섯째로 태어났다. 마이클 잭슨의 본명은 Michael Joe Jackson인데, 이것은 그가 운영하는 MJJ 프로덕션의 이니셜이 되기도 하였다. 그는 분명 하늘이 내린 축복을 받고 태어난 듯, 마이클의 부모는 어려운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아버지 조셉은 철강소에서 크레인 기사로 일했는데 밤에는 팰컨스라는 블루스 밴드에서 기타리스트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어머니 캐서린은 보컬리스트이자 클라리넷 연주가이기도 했다.
   세월이 흐르고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었으며 감당 못할 정도로 식구가 늘자 음악에 쏟았던 열정이 차츰 식었다. 그러던 중 집안 분위기 탓이었는지 조셉의 9남매는 거의 음악에 남다를 재능을 보였고 그중 거침없이 유명 가수의 노래를 따라부르는 당찬 꼬마 마이클의 재능은 그의 아버지로 하여금 무한한 교육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조셉은 지독하다 싶을 정도로 아이들에게 악기를 가르치고 스파르타식으로 춤과 노래를 연습하게 했다. 당연하게도 형제 그룹의 메인 싱어는 마이클의 차지가 되었는데, 당시 다섯 살이던 마이클은 대부격인 제임스 브라운의 목소리와 춤을 흉내낼 수 있었고 유명 R & B가수들도 독특하게 모방할 수 있었다. 너무나 엄격하고 혹독한 연습과 스테이지 매너 익히기가 이어졌는데 조셉으로서는 아들들의 부업으로 경제적 부담을 덜어보자는 데에도 목적이 있어서 더욱 심해지기도 했다.
   "학교에 갔다 집에 돌아오면 매일 아버지는 연습 채비를 끝내고 형제들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버지는 우리들이 완벽하게 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해서 반복연습을 시키곤 했어요. 오후 3시부터 시작한 것이 한밤중까지 이어질 때가 많았습니다. 아마 하루에 7시간 이상씩 연습했을 거예요. 우린 정말 불만을 터뜨리고 싶었던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고 집을 나가고도 싶었어요." 마이클은 이렇게 회상하고 있는데 그때의 앙금이 남아 아직도 부자지간은 약간 서먹한 편이 아닌가 싶다. 실제로 마이클은 한 공연에서 "아버지를 용서한다." 고 말한 적도 있다. 그러나 어린 시절 잭슨파이브 내에서 활동하던 그의 모습은 유년시절의 추억으로 족하다. 'King of Pop'으로 부상하는 시절이 오는 것이다
   마이클은 소년기에 맑고 청아한 미성으로 높은 인기를 구가하였다. 몇해 전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가 리메이크해 발표한 'I'll be there'는 본디 마이클의 미성으로 불렸던 노래이다. 그러나 사춘기가 오자 남자로서 변성기를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마이클은 시련을 딛고 일어났다. 1979년 솔로 독립을 선언하며, 황금의 손 퀸시 존스의 도움으로 대망의 첫 솔로앨범 [Off the Wall]을 발표한다. 미국내에서 800만장이라는 판매고를 올렸으며 그래미 최우수 R&B 퍼포먼스를 수상했다. 바로 이 시점 마이클은 무대공연 도중 제자리에서 도는 동작을 취하다가 심하게 넘어져 코뼈가 부러져 버리고 만다. 이후로 수차례의 성형 수술을 받게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백인처럼 되기 위하여 성형수술을 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뜬소문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서, 그런 수술은 의학적으로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피부가 흑인임에도 불구하고 하얀 것은 백반증이라고 하는 피부병에 걸렸기 때문인데, 피부의 색깔이 군데군데 빠져 얼룩이 생기고, 심하면 온몸에 커다란 얼룩이 생기는 병인데, 자외선 자극에 특히 민감하여 마이클은 늘 선글라스를 쓰고 검은 우산을 쓰고 다니는 것이다. 화장을 두껍게 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다음으로 나온 앨범이 82년의 [Thriller]인데, 이것이야말로 바로 마이클을 'King of Pop'으로 만들어준 음반이다. 총 9곡 중 모든 곡이 Billboard No.1 또는 Top 10에 들어갔다. 5,200만장의 판매고로 기네스북 1위에 올랐다. 하지만 지금도 계속 판매되고 있는 앨범이다. 26회 그래미 시상식에서 8개 부문을 휩쓰는 대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는 이제 노래뿐 아니라 화려한 의상과 문 워킹(Moon Walking)을 선보이며 격렬한 춤을 유행시키기도 했다. 동시에 답보상태에 있던 뮤직비디오의 가치를 재인식시켰다. 1987년에 발표된 [Bad]는 총 11곡중 5곡이 Billboard No.1에 올라 또 하나의 기네스 기록을 만들어 냈다. [MoonWalker]는 뮤지컬 형식으로 [Bad]를 기초로 하여 만든 영화이다.
   1991년에 발표된 [Dangerous]는 퀸시 존스에게서 떨어져 나와 만든 첫 앨범으로서, 2850만장 이상의 판매량를 기록하였다. 녹음, 믹싱, 프로듀싱 등의 측면에서 매우 획기적이었던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마이클은 [Dangerous] 앨범 발표 후 전세계적으로 고통받고 있는 어린이들을 돕기 위해 "Heal the World 재단"을 설립하여 많은 자선활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또한 마이클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결혼,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1996년에 발표된 [History]는 "past, present, and future"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데, 자신의 과거, 현재에 이르는 역사를 정리하며 미래의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기존 히트곡과 15곡의 신곡들로 구성된 더블앨범으로 96년에 발표되었다. 러닝타임 150분에 2장의 CD와 카세트, 3장의 LP, 그리고 그의 친구 및 팬들의 추천사, 축하문, 사진, 수상내역 등이 담긴 소책자까지 마이클에 대한 자료가 총망라되었다. 그는 "History Tour"에서야 고대하던 한국 공연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1996년 10월 11일, 13일 두 차례에 걸쳐 잠실 종합운동장에서 마이클 잭슨의 "History Tour in Seoul" 공연이 있었다. 11일은 평일인 관계로 만석이 되지 못했지만 13일 일요일 공연의 R석은 예매 시작후 2, 3일만에 동이 나버렸다.
   1997년에 발표된 [Blood on the Dance Floor] 앨범은 이제 마이클의 성숙한 모습을 볼 수 있는 앨범이다. 춤에도 절제가 있으며, 완전한 King of Pop으로서 보이는 여유가 돋보인다. 다만 아쉬운 점은 총 13곡중 5곡만이 신곡이며 나머지는 모두 리메이크 버전이라는 점이다. 그나마 5곡 중에서도 'Morphine'이라는 곡은 가사 내용이 건전치 못하다는 관계로 심의를 통과하지 못하여 한국에서는 12곡짜리 앨범만이 유통되고 있다.
    마이클은 이제 40대이다. 체력이 떨어져서 오랫동안 격렬하게 춤을 추는 일도 이젠 힘이 들고 숨이 찬다. 젊은 가수들이 폭풍을 일으키며 쫓아오려 한다. 그러나. 마이클은 감히 가까이 갈 수 없는 그야말로 King of Pop이다. 도대체 이 시대 이후로 어떤 사람이 또 그가 남긴 것과 같은 역사를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아무도 감히 그런 사람이 나타나리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세상에 춤을 잘 추는 사람은 많다. 또 노래를 잘하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그 두 가지를 겸비한 사람은 극히 드물며, 그는 대부분의 곡들을 직접 작곡한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끼'이다. 관객들을 압도하고 카리스마로 누를 수 있는 엔터테이너의 '끼'를 갖춘 사람은 그야말로 마이클 잭슨 단 한 사람 뿐이다. 사실 그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춤과 노래이지만 그것은 그가 기타나 피아노를 못쳐서가 아니다. 그는 정말로 만능 엔터테이너이다.
 
    

 

 

 

 

* <영원한 팝의 황제로 기록될 마이클 잭슨>
 
열창하는 마이클 잭슨
(서울=연합뉴스) 조보희 기자
지난 1996년 10월 11일 서울 송파구
잠실동 올림픽주경기장에서 공연을 갖은 미국 팝 가수 마이클 잭슨

(서울=연합뉴스) 김중배 기자 = 소년 시절부터 팝의 신동이었고,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팝스타였으며, 지구상 최고의 음악인으로 기록될 마이클 잭슨이 50세의 아까운 나이에 스러졌다.

   고인은 갔지만 음악과 춤, 이들이 더해진 화려한 뮤직비디오를 선보이며 대중문화를 한 차원 더 높은 단계로 끌어올린 `팝의 황제'란 칭호는 영원히 남을 것으로 보인다.

   누구보다도 화려한 나날을 보낸 이 최고의 스타는 그러나 2005년 아동에 대한 성적 학대와 성형수술 논란에 휩싸이며 대중으로부터 멀어진 은둔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두 번의 공식 결혼과 3명의 아이에 대한 양육권을 가진 그는 어린이에 대한 성적학대 사건을 비롯한 여러 소송에 시달리는 등 평탄치 못한 삶을 살았다.

   1958년 8월29일 인디애나 주 게리의 한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마이클 잭슨은 어렸을 적부터 음악에 대한 재능을 맘껏 뿜어냈다.

   그는 4명의 형들과 함께 구성한 `잭슨파이브'에 6세 때부터 참여했다. 이들은 모타운 레코즈 에 소속돼 7장의 플래티넘 싱글을 기록했으며 이 가운데 3장은 200만장 이상을 판매하는 멀티 플래티넘 반열에 올랐다. 이후 이들은 1976년 CBS의 에픽 레코즈로 적을 옮겼다.

   초기 성공에도 불구하고 잭슨의 어린 시절은 순탄치 않았다. 아버지로부터 학대를 경험했던 잭슨은 이 시기를 불행하고 고독한 시절로 기억했다.
잭슨파이브와 결별한 잭슨은 1979년 제작자인 퀸시 존스 아래에서 첫 솔로 앨범인 `오프 더 월'을 내 1천만장 이상을 판매하는 성공을 거뒀다.

   퀸시 존스와 다시 뭉쳐 1982년 제작한 `스릴러'는 그의 작곡가 및 공동제작자로서의 재능까지 입증하면서 팝 역사상 전무후무한 4천1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최고의 히트를 거둔다. 그러나 오히려 초기의 지나친 성공이 그에게 독이 됐다는 지적도 있다. 시러큐스대 팝문화 전공인 로버트 톰슨 교수는 스릴러의 성공이 잭슨에게 지나친 부와 권력을 안겼고, 이후 그를 현실로부터 멀어지게 했다고 말했다.

   이후에도 잭슨은 1987년 `배드(2천만장)', 1991년 `데인저러스(2천100만장)' 등 앨범을 히트시켰다. 팝 문화의 아이콘으로 등장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한 잭슨은 1991년 소니뮤직과 아티스트 역사상 최고액의 계약을 맺은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잭슨은 1993년 어린이에 대한 성적학대 사건으로 인해 구설수에 오르며 1년후 무려 2천330만달러에 이르는 합의금을 치러야 했다. 이후 그는 이 합의를 후회했다.

   잭슨은 성형수술로 인한 외모의 변화로도 구설수에 올랐다.
   수년에 걸쳐 그의 피부는 얇아져갔으며 부작용에 시달렸다. 배너티 페어 지(誌)는 그의 코끝이 보철물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잭슨은 1994년 당시 26세인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결혼해 대중을 놀라게 했지만, 이 결혼은 2년도 채 가지 못했다.
   이후 내는 앨범마다 실패하는 비운을 겪은 잭슨은 1997년 성형수술 당시 만난 간호사 데비 로(당시 37세)와 재혼해 두 명의 아이를 낳았으며, 1999년 이혼했다.

   잭슨은 2002년 독일 베를린의 한 호텔에서 이름모를 여성으로부터 얻었다는 막내아들을 잡고 발코니 밖으로 흔들어대 대중의 엄청난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2005년 아동학대 사건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잭슨은 이후 바레인과 아일랜드, 프랑스 등을 전전하며 은둔 생활을 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7월13일 예정된 런던 콘서트를 통해 컴백 무대를 가질 예정이었다. 지난 3월 런던에서의 짧은 기자회견에서 그는 10년간의 공백후 갖는 이 공연이 고별무대임을 예고했다.
                                                                     

 

* 美언론 "아메리칸 아이콘-슈퍼스타가 죽었다" 애도

 

미국 언론 등이 25일 오후(현지 시간) 갑작스레 사망한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을 "아메리칸 아이콘" "슈퍼스타" 등으로 표현, 충격 속에 깊은 애도의 뜻을

 보이고 있다.

미국의 대표적 24시간 뉴스 채널 CNN은 26일 오전 9시30분(한국 시간) 현재까지

정규 뉴스 대신 '긴급 속보-마이클 잭슨 사망'(Breaking news-Michael Jackson Dies')이란 제목으로, 마이클 잭슨 사망 관련 소식을 1시간 넘게 내보내고 있다.

CNN 앵커들은 마이클 잭슨의 사망 소식을 보도하며 세계적 스타였던 그를

가리켜 "아메리칸 아이콘"이라 표현하며 애도의 뜻을 전했다.

미국 내 다른 언론들도 인터넷을 통해 마이클 잭슨의 사망 관련 속보를 쏟아냄과

동시에 마이클 잭슨을 "슈퍼스타"라 칭하고 있다.

한편 해외 연예전문사이트 TMZ.com 및 AFP, LA타임즈 등 해외 언론들에 따르면

마이클 잭슨은 25일 낮 12시(현지 시간)께 LA 자택에서 급성 심정지(caediac arrest)로 인한 심장마비 증세를 보였고, 이 때 심장과 맥박은 이미 뛰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신고를 받은 LA 소방국 대원들이 마이클 잭슨의 LA 자택에 이날 오후 12시 20분께 도착했을 때도, 마이클 잭슨은 숨을 쉬지 않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후에도 구급 대원들이 마이클 잭슨에게 지속적으로 심폐소생술을 했고 UCLA 메디컬센터로 옮겨진 뒤 역시 응급조치를 계속 취했지만, 끝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의 음악 세계



(서울=연합뉴스) 임은진 기자 
13개 넘버원 싱글, 7억5천만장 앨범 판매고,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 13개 그래미상 수상… 마이클 잭슨은 수많은 히트곡을 남기며 '팝의 황제'로 군림했다.
잭슨은 6살 때인 형제들과 함께 '모타운'(Motown) 레이블에서 '잭슨 파이브'(The Jackson 5)와 '잭슨스'(The Jacksons)로 팝계에 데뷔했다.
6년 동안 형제들과 활동하면서 잭슨은 '아일 비 데어'(I'll Be There), '아이 원트 유 백'(I Want You Back), '더 러브 유 세이브'(The Love You Save) 등의 히트곡을 남겼다.

1975년 모타운을 떠난 잭슨은 전설적인 음악 프로듀서인 '퀸시 존스'(Quincy Jones)를 만나 3년 뒤 첫 성인 솔로 앨범인 '오프 더 월'(Off The Wall)을 발표했다.
전 세계적으로 1천만장이 팔린 이 앨범엔 '록 위드 유'(Rock With You)와 '돈 스톱 틸 유 겟 이너프'(Don't Stop 'Til You Get Enough) 등이 수록돼 있다.
1982년 잭슨은 팝 역사상 전설로 기록된 '스릴러'(Thriller) 앨범을 발표했다.
현재까지 전 세계적으로 1억400만장 이상이 팔린 앨범이자 이듬해 올해의 앨범상을 비롯해 그래미 8개 부분의 상을 휩쓴, 말 그대로 '초대박'난 앨범이다.
이 앨범엔 '빌리 진'(Bille Jean), '빗 잇'(Beat It), '스릴러', '걸 이즈 마인'(Girl Is Mine) 등이 수록돼 있다.
이 앨범은 발매 직후 37주 동안 빌보드 차트 1위를 기록하고 수록곡 9곡 중 무려 7곡이 차트 10위권 내에 올랐으며 1985념 기네스 북에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기록됐다.
작년에 발매된 '스릴러' 발표 25주년 기념 앨범도 출시되자마자 단숨에 '빌보드 카탈로그 앨범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1987년 3천만장이 팔린 '배드'(Bad)를 발표한 뒤 잭슨은 그의 첫 솔로 투어를 시작했다.
1991년 '데인저러스'(Dangerous)는 퀸시 존스와 헤어진 뒤 발표한 첫 앨범으로 잭슨의 작곡과 제작 능력을 펼친 음반이다.
비록 '너바나'(Nirvana) 등 당시 불어닥친 얼터너티브 록 열풍에 판매고 측면에서 큰 파괴력은 없었지만 영화 '프리윌리'의 주제곡으로 쓰인 '윌 유 비 데어'(Will You Be There) 같은 곡은 평단과 팬들의 호평을 이끌어냈다.

1995년 잭슨은 그를 괴롭혀온 어린이 성추행 사건과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 미사-마리 프레슬리와의 결혼 등에 대한 언론의 포화를 반격하는 앨범 '히스토리'(HIStory)를 발표한다.
앨범 이름이 단순한 '역사'(History)가 아닌 '그의'(His)와 '이야기'(Story)가 결합된 조어란 점에서 그 동안 잭슨의 음악과 다른, 조금은 거친 사운드가 지배적인 음반이었다.
2001년 3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잭슨은 앨범 '인빈서블'(Invincible)을 발표했다.
2009년 잭슨은 영국 런던에서 마지막 공연을 준비 중이었으며 공연 티켓은 발매 시작한 지 며칠 만에 75만장 모두 매진되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 백반증에서 슈퍼박테리아까지…잭슨 계속된 건강이상

 

가수 마이클 잭슨이 25일(이하 현지시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현지 언론들이 보도했다. 한때 팝의 황제로 군림하며 음악으로 세계를 지배했던 그의 마지막 생은 각종 추문과 거대한 빚, 그리고 끊이지 않는 건강 이상설이었다.

가장 최근 불거져 나온 설은 바로 잭슨의 피부진단 관련 보도였다. 지난 5월 외신들은 잭슨의 목과 얼굴에 반점이 생겼으며 조사 결과 목의 반점은 피부암 세포이며 얼굴의 반점은 피부암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있는 것을 확인됐다고 보도했다.

이에 대해 국내외 피부 전문가들은 잭슨의 백반증(표피층에 존재하는 멜라닌 세포 수가 감소하는 질환)이 원인이 됐을 것이라는 추측을 내 놨다. 만일 잭슨이 백반증을 앓고 있었다면 그에 따른 자외선 차단능력 저하 및 피부미백을 위해 장기간 걸쳐 사용했던 화학약품, 그리고 잦은 성형이 원인이 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올 초에는 성형부작용으로 인한 슈퍼박테리아(그 어떤 항생제에서도 살아남는 병원균)에 감염됐다는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이 소식을 전한 영국의 타블로이드 ‘더 선’은 잭슨이 슈퍼 박테리아인 메티실린 내성 황색포도상구균(MRSA) 타입 감염증에 걸렸다고 보도했다.


보도 내용에 따르면, 잭슨은 얼굴 등에 번진 박테리아를 없애기 위해 정맥 항생제 치료를 받고 있으며 이 박테리아가 온 몸으로 퍼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당시 잭슨은 유난히 창백하고 뺨이 심하게 부어오른 상태로 미국 베벌리힐스의 한 병원을 방문하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해 의혹을 증폭시켰다.

잭슨의 성형루머는 역사가 깊다. 1982년 ‘스릴러’로 승승장구하던 무렵 광고촬영 중 화상을 입은 후부터 박피설과 성형 중독설에 시달리기 시작하더니 사망 직전까지도 온갖 루머가 끊이지 않았다. 당시 피부가 하얗게 변하면서 나돌기 시작한 성형 중독설은 시간이 지나면서 화상으로 인한 백반증 때문이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러나 오는 7월 영국 공연을 앞두고 잭슨이 다시 성형수술을 할 계획이라는 보도가 나와 그가 성형 중독에 걸린 것이 아니냐는 의혹에 다시 불을 붙이기도 했다. 잭슨의 전기를 쓰고 있었던 저널리스트 이안 핼퍼린은 “잭슨이 오는 7월 런던 공연을 앞두고 팬들에게 최상의 모습을 선보이기 위해 얼굴성형을 받을 계획”이라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성형외과 의사의 진단을 받았다”고 언론에 알렸다.

이 언론은 잭슨이 이미 50회 이상의 성형수술을 받았고 무너진 코의 복원을 원하고 있던 중이라고 전했다. 핼퍼린은 지난 해 말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잭슨이 희귀호흡기 질환으로 위독한 상태라고 주장한 인물이다.

마이클 잭슨의 비즈니스 매니저이자 대변인인 닥터 톰 톰은 최근 영국 타블로이드 데일리 미러와의 인터뷰에서 "잭슨은 매우 건강하다"며 "마이클 잭슨이 컴백을 결정한 건 자신의 건강에 대한 말도 안 되는 소문들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잭슨 측은 이 모든 건강이상설 및 성형계획설을 전면 부인하고 나섰다. 마이클 잭슨의 대변인은 성명을 통해 “잭슨이 음악활동을 중단한 것은 홀로 아이를 키우는 아빠로서 세 아이의 육아에 전념하기 위해서”라며 “런던 공연도 슈퍼박테리아 감염설 등 말도 안 되는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라고 강력하게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이번 잭슨의 사망과 함께 그의 건강 이상설이 사실로 확인된 것이나 다름 없어 팬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 마이클 잭슨, 빚만 2000억원

 

가수 마이클 잭슨이 25일(이하 현지시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현지 언론들이 보도했다. 한때 팝의 황제로 군림하며 음악으로 세계를 지배했던 그의 마지막 생은 각종 추문과 추락하는 건강, 그리고 거대한 빚뿐이었다.

잭슨은 사망 직전 몇 개월 간 월 10만 달러짜리 임대주택에서 세 자녀와 함께 거주해 왔다. 잭슨의 꿈의 왕국이었던 산타바바라의 대저택 ‘네버랜드’는 성추문 소송 등으로 막대한 빚을 져 경매 위기에 처해 았다가 시카모어밸리라는 부동산 개발업체에 인수됐다.

웬만한 집 한 채 가격인 임대주택 월세는 사모펀드 회사로부터 가까스로 대출을 받는 데 성공해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 대출금은 앞으로 발매되는 새 음반의 수입과 순회공연 수입으로 갚는다는 조건으로 이뤄졌으며, 채무 상환이 여의치 않으면 여타 주요 재산이 채권자들의 수중으로 떨어질 수 있는 조건이었다.



잭슨은 이 어마어마한 빚을 갚기 위해 미국 라스베가스카지노도 열 계획이었다. 카지노 이름은 ‘스릴러(Thriller)’. 좀비를 테마로 한 이 카지노는 그의 새 앨범과 출연 영화에 관한 상영도 하며 그의 아이콘 시절을 테마로 한 박물관도 운영할 예정이었다.

잭슨은 또 내년 3년간의 월드투어 등 부채를 갚기 위한 여타 사업진행 계획도 세우던 중이었다. 잭슨은 현재 약 1억 파운드(약 2033억원)의 빚을 진 것으로 전해졌다.

잭슨의 대변인은 그가 이 집에 살면서 자신의 꿈의 집을 세우는 방안을 검토할 예정이었다고 설명했다. 또한 “앞으로 나머지 반생이 전에 비해 훨씬 나아질 것”이라고 재기의 의지를 다져온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잭슨은 공연과 저술활동, 그리고 꿈의 집에 대한 청사진을 펼쳐보기도 전 안타깝게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LA타임즈는 현지 소방서의 긴급 의료진이 잭슨의 자택에 도착했을 당시에 이미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상태였으며, 이에 따라 의료진이 심장과 폐 소생술을 시도한 뒤 UCLA 메디컬센터로 옮겼다고 전했다.

마이클 잭슨 측에서 이날 낮 12시30분께 현지 소방서에 긴급 후송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의 공영방송인 BBC에 따르면 올해 50세인 마이클 잭슨은 다음 달 13일 영국 런던에서 컴백 콘서트 시리즈를 준비중이었다. 

 

 

* 마이클 잭슨 한국 공연과 한국 팬



(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 25일(현지시간)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의 사망 소식은 한국 팬들에게도 충격을 안겼다.
잭슨이 1970~1990년대를 아우르며 국내에서 큰 사랑을 받았기에 인터넷에는 '그는 동시대를 살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자부심과 행복을 준 사람', '100년, 1천년에 나오기 힘든 팝의 천재', '진정한 월드스타' 등 애도의 글이 쏟아지고 있다.

잭슨은 한국 팬들과도 인연이 깊다. 그는 1996년 서울에서 첫 내한 공연을 펼쳤고 1997년 11월 무주리조트 투자협의, 1998년 2월 김대중 대통령 취임 축하 등을 위해 한국을 찾았다.
한국 팬들에게 가장 큰 인상을 남긴 건 아들 프린스, 딸 패리스를 동행한 1999년 네번째 방문.


잭슨은 그해 6월25일 서울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에서 세계전쟁희생자 및 불우어린이돕기 자선공연 '마이클 잭슨과 친구들'을 개최했다. '친구들'로는 머라이어 캐리, 루더 밴드로스, 보이즈투멘 등 최고의 팝스타들이 대거 무대에 올랐으며 대만의 코코리, 홍콩의 리밍(黎明) 등 중국어권 가수를 비롯해 국내에서도 H.O.T와 S.E.S가 참여했다.
4만여 관중이 모인 이날 공연은 '지상 최대의 쇼', '금세기 마지막 빅 이벤트'라는 찬사답게 수준 높은 음악과 400톤의 대규모 자재가 투입된 무대로 볼거리를 제공했다.

하이라이트는 단연 마이클 잭슨의 무대였다. '블랙 오어 화이트(Black Or White)', '빌리 진(Billie Jean)', '어스 송(Earth Song)' 등을 독창으로 부른 그는 이어 머라이어 캐리와 듀엣곡을 불렀고 관객의 환호는 절정에 달했다. 그는 대표곡 '유아 낫 어론(You Are Not Alone)'으로 화답해 큰 박수를 받았다.
내한 당시 잭슨은 한국 어린이들과 나들이를 나와 눈길을 끌기도 했다.

한국에서 공연하는 마이클 잭슨

지난 1996년 10월 방한한 마이클 잭슨이 서울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에서 '평화와 환경을 위한 공연'을 펼치는 모습.


그는 공연 3일 전인 6월22일 국내 보육 시설의 어린이들과 함께, 첫 내한 공연 당시 방문했던 서울 강남역 인근 강남 타워레코드를 찾았고, 경기도 용인 에버랜드도 방문했다.
자신의 사진과 손도장이 담긴 에버랜드 동판 제막식에 참가한 그는 "내 생애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며 "한국을 정말 사랑하고 앞으로도 사랑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잭슨의 주위에는 수백명의 팬들이 '마이클'을 소리 높여 외쳤고 그는 몰려드는 어린이들에게 손키스를 던지며 화답하는 친절함도 보였다.

또 그는 공연 전 서면 메시지를 통해 "이번 공연을 통해 세계 유일의 분단 민족인 한국 민족의 고충에 대해 전 세계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되길 바란다"며 "독일처럼 한국도 곧 통일이 되길 희망하며 그날 다시 여러분과 만날 것을 약속한다"고 전하기도 했다.
잭슨은 한국에서 공연을 펼친 지 만 10년이 되는 그날 세상을 떠났고, 약속은 끝내
이뤄지지 못하게 됐다.
 

* 韓 팬들, 마이클 잭슨 애도..."시대 풍미한 천재가수, 안타깝다"

이데일리 김은구  입력 2009.06.26 08:38 |수정 2009.06.26 09:44 |

▲ 故 마이클 잭슨


[이데일리 SPN 김은구기자]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의 사망소식에 국내 팬들이 애도하고 있다. 26일 마이클 잭슨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국내에 전해진 뒤 인터넷에는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네티즌의 글들이 적잖이 올라오고 있다.
성형 부작용, 아동 성추행 등 각종 추문에 휘말리기는 했지만 마이클 잭슨은 '벤', '빌리진', '
힐더월드', '블랙 & 화이트'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남기며 전세계 팬들을 흥겹게 했던 스타다.

국내 팬들의 애도 역시 그런 마이클 잭슨의 음악적 업적을 기리는 것.
한 네티즌은 "아침부터 충격이었다. 구설수도 많았지만 그래도 역시 스타였다"라며 "마이클 잭슨이라는 이름을 세상에 새기고 갔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추모 글을 남겼다.
또 다른 네티즌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천재가수인데 (사망했다니) 안타깝다. 많은 나이도 아닌데…. 명복을 빈다"고 적었다.

이와 함께 "누구보다 순수해서 어린 아이 같았던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이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니…. 젊은 날 많은 세월을 마이클 잭슨의 노래와 함께 보냈는데 오늘은 그의 '휴먼 네이처'를 듣고 싶다. 명복을 빈다. 다음 세상에서는 평범한 사람들이 누리는 행복을 다 누리길 진심으로 바란다" 등 명복을 비는 글들이 줄을 잇고 있다.
이에 앞서 엔터테인먼트 사이트 TMZ닷컴은 마이클 잭슨의 사망소식을 보도했으며 AP통신은 제보자의 말을 인용해 마이클 잭슨이 50세를 일기로 25일(현지시간) 사망했다고 공식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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