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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d Zeppelin ...

구름에 달 가듯이 2011. 5. 25. 15:59

 
 
Stairway To Heaven

stairway to heaven_led zeppelin(1971).wma

 

 
::::  Led Zeppelin  ::::
 
   1970년대 록을 대표하는 수퍼그룹

레드 제플린의 역사는 1961년

지미 페이지의 나이 열일곱살 때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엘비스 프레스리와 리틀 리차드 등의 록큰롤이 쇠퇴하고 팻 분, 폴 앵카, 바비 다린, 닐 세다카 등의 틴아이돌들이 시대를 풍미하던 당시, 50년대 록큰롤을 들으며 자란 평범한 전후세대였던 지미 페이지는 도저히 당시의 유치한 틴아이돌 음악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그룹 'Neil Christian & The Crusaders'에 가입해 최초의 그룹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이때 그가 추구했던 음악은 리듬 앤 블루스였다. 그 후 'Cynil Davis All Stars'에 가입, 기타리스트로서 맹활약을 펼치면서 그는 distortion, feedback 등의 기타 연주기법을 스스로 개발하게 되지만, 당시는 록큰롤이 숨을 거둔 때였으므로 이러한 그의 재능은 별로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비틀즈의 열풍이 불어닥치고 록이 화려하게 부활하게 되면서, 그는 일약 재능 있는 기타 연주가로 평가를 받게 된다. 1963년 이무렵 세계적으로 유명한 프로듀서인 C.L.Tarumi는 그를 레코드 디렉터 겸 프로듀서로 발탁했다. 이때부터 그는 세션맨 활동을 시작했고, 전영국 레코딩기타연주의 삼분지일을 담당했을 정도로 맹활약을 펼쳤으며, 당시 야드버즈의 멤버였던 에릭 클랩튼과 함께 일을 하기도 한다.
   이렇게 이름을 날린 지미 페이지는 1966년 그의 나이 스물두살때 명 그룹 '야드버즈'의 기타리스트로 영입된다. 그는 처음에는 베이스를 담당했지만 곧 천재성을 인정받아 당시 세계 최고의 기타 테크니션인 제프 벡과 '트윈리드'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물과 같이 차가우면서도 엄청난 테크닉의 소유자인 제프 벡의 기량에는 그의 천재적인 기타실력도 도저히 미칠 수 없었다. 앨범 'Roger The Engineer'의 작업을 하면서 그는 제프 벡이 구사한 기발한 트릭과 풍요로운 음색에 질려버리게 되고, 자신의 진정한 재능은 기타가 아니라 작곡 겸 프로듀싱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물론 이때 그는 제프벡으로부터 블루스를 기본으로 한 스피드감을 전수받았고, 이는 그가 이후 제프 벡이 구상한 하드록적인 패턴을 레드 제플린을 통해 완성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야드버즈가 미국으로 건너갈 것을 결정하면서 제프 벡이 그룹을 정식으로 탈퇴하자, 이후 야드버즈는 마지막 싱글 'Goodnight Sweet Josephine'을 내놓고 1968년 7월 해체되기에 이른다. 이때 그룹의 막내인 지미 페이지는 끝까지 남아 그 명맥을 잊고자 크리스 트레져와 손을 잡지만, 곧바로 그가 탈퇴함으로써 실질적으로 혼자 남게 된다. 결국 지미 페이지는 피터 그랜터와 함께 'Super Hype Recording'이라는 회사를 차리고 야드버즈의 새로운 멤버 모집에 들어간다. 이때 영입된 멤버들이 존 폴 존스(베이스, 키보드), 존 보냄(드럼), 로버트 플랜트(리드보컬, 하모니카)로서 이들은 장래 레드 제플린의 전설적인 멤버 4인이 되는 사람들이다.
   당시 스물세살이던 존 폴 존스는 롤링스톤즈의 레코딩에도 참가했던 최고의 스튜디오뮤지션이었고, 스물한살로 동갑이었던 존 보냄과 로버트 플랜트 역시 다채로운 경력을 지닌 일류급의 뮤지션이었다. 이러한 막강 진용을 갖춘 이들은 처음 야드버즈의 영광을 되살려보자는 의미에서 'New Yardbirds'란 이름으로 그룹 활동을 전개하지만, 전대의 이미지에서 탈피, 제프 벡의 하드록패턴에 버팔로 스프링필드와 같은 어쿠스틱록을 절충하는 식으로 새출발을 해보려 했던 그들에게 이러한 밴드명은 확실히 부담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밴드명을 'Led Zeppelin'으로 바꾸었다. 'Led Zeppelin'이란 이름은 1차 대전 때 하늘을 주름잡았던 독일의 대형 비행선 'Zeppline'과 납으로 만든 대형 기구 'Lead Balloon'의 Lead를 합성해 만든 것으로, 친구 음악인인 키스 문의 아이디어에 영감을 얻어 그룹의 연장자인 지미가 정한 것이었다. 이러한 이름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그들의 음악은 웅장하고 위압적인 면이 강하다. 하지만 그것이 이름덕인지 이름탓인지는 아직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해서 1968년 레드 제플린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이들이 가장 먼저 착수한 작업은 그룹으로서의 통일된 사운드의 창조였고, 야드버즈로부터 이어져내려온 블루스와 야성적인 사운드를 바탕으로 한 록을 창조해내면서, 여기에 소울 풍의 강렬한 보컬을 융합시킨다. 이렇게 해서 런던 일대의 클럽 무대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캐리어를 닦아나가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 레드 제플린이라는 존재는 팬들에게 생소했으므로 이들의 포스터에는 언제나 '이전의 야드버즈'라는 달갑잖은 주석이 따라다녔다.
   하지만 워낙 막강멤버들이 모인 데다 야드버즈의 후광도 만만치 않았으므로 어틀랜틱 음반사는 그들에게 거액을 제시하고 레코딩 계약을 체결하였다. 이를 계기로 그들은 기수를 미국으로 돌려 1968년 10월 하순 미국 살레 대학의 무대를 시작으로 오랜 콘서트 투어를 펼치고, 1969년 2월에는 대망의 셀프 타이틀 데뷔 앨범과 여기에서 커트한 데뷔 싱글 'Good Times Bad Times'를 각각 미국시장에 선보인다. 이 곡은 처음부터 지미 페이지의 위압적인 강력한 기타 리프와 함께 유연한 드러밍으로 시작되었는데, 로버트 플랜트의 흐느적거리는 보컬도 괜찮았지만 무엇보다 맛을 살린 것은 존본햄의 드러밍이었다. 베이스 드럼을 무려 두 개나 두고 여기에 유난히 두꺼운 킥드럼을 무자비하게 두들긴 존본햄의 드러밍은 그 파워에 있어 누구도 따를 수 없을 지경에 이미 올라있었다. 지미 페이지는 기가 막힌 신인들을 발굴했던 것이다.
   당시 록계는 비틀즈와 크림, 지미 헨드릭스와 재니스 조플린, 그리고 사이몬 & 가펑클이 한꺼번에 사라진 직후였다. 무엇보다도 비틀즈의 퇴장이 갖는 공백감은 엄청난 것이었기 때문에 모든 이들은 비틀즈의 뒤를 이을 대형 그룹을 애타게 찾고 있던 참이었다. 레드 제플린은 이에 적절히 부응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그룹이었고, 그들의 미국상륙작전은 그대로 적중해 대성공을 거두었다. 데뷔 싱글이었던 'Good Times Bad Times'는 1969년 빌보드 핫100 싱글 차트 80위라는 저조한 순위를 기록했으나, 앨범은 순식간에 50만장 판매고를 돌파하며 빌보드200 앨범 차트 톱10에 랭크되는 기록을 세웠다.
   이들의 데뷔 앨범은 그동안의 경력을 통해 지미 페이지가 구상해오고 있던 새로운 음악형태가 드디어 빛을 발한 것으로서, 여기서 보컬과 기타의 텐션 밸런스라고 하는 하드록과 헤비메탈의 기본패턴은 비로소 구축되기에 이른다. 무엇보다도 젊고 야심에 넘치는 실력파 뮤지션들이 마치 용이 하늘을 나는 듯한 거친 열정을 전했던 데다, 블루스에 뿌리를 두고 전개된, 강력하고 뜨겁게 타오르는 제플린의 헤비 사운드는 데뷔 앨범 한장만으로도 센세이션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특히 존 바에즈의 포크곡을 리메이크한 'Babe I'm Gonna Leave You'는 지미 페이지가 블루스에 포크록까지 훌륭히 소화하고 있음을 과시함과 동시에 어쿠스틱한 멜로디와 하드록의 파워를 적절하게 융합시킨 지미 페이지의 저력이 드러나고 있었다. 또한 기괴하고 혁신적인 사운드의 'Dazed and Confused'에서는 존 폴 존스의 단단한 베이스음를 축으로 한 지미의 기타연주가 이어졌으며, 후반부에는 존의 베이스와 지미의 기타 속주 경쟁이 불꽃 튀었다. 이후로도 존 폴 존스는 독특한 사운드적인 감각과 실험적인 정신을 보여주었고, 다양한 음색의 건반연주를 통해 제플린 사운드에 양념을 넣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특히 신디사이저에 대한 그의 식견은 매우 뛰어난 것이었다. 네 명의 멤버 모두가 최고의 기량을 소유한 정통 록그룹. 레드 제플린의 신화는 이미 시작된 것이었다.
   데뷔 앨범이 공개된지 불과 6개월 후인 1969년 8월에는 헤비메탈의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Whole Lotta Love'가 발표되어 4위('69.11)를 기록했다. 흔히 하드록이라 정의할 수 있는 최초의 곡이며 헤비메탈의 도래를 10년 앞당긴 곡이라고도 불리우는 'Whole Lotta Love'는 도입부에서부터 들소가 밀고나가는 것 같은 도발적 기타리프라는 새로운 전통을 만들었으며, 소리가 좌우 스피커사이로 날아다니는 느낌, 갖은 기괴한 음향, 소리가 좌우 스피커로 빨려 가는 듯한 녹음은 그 당시의 사고로서는 실로 획기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약간은 동양적 뽕짝과 여백의 분위기가 배어나오는 'Ramble on'은 전체적으로 포크의 기반하에 어쿠스틱한 터치로 곡을 감싸면서도 플랜트의 보컬이 기막힌 강약의 완급조절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는 무조건 무식하게 밀어붙이기만 하는 다른 록밴드의 보컬과 플랜트의 보컬은 차원이 다름을 말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곡들이 수록된 두번째 앨범 'Led Zeppelin II'는 발매 3개월만에 감격의 1위('69.11)에 오르는 쾌거를 이루었고, 이 앨범으로 레드 제플린은 미국에서만 5백만 달러를 벌어들임으로써, 국고 수입에 공헌했다는 이유로 영국 정부로부터 플래티넘 디스크와 골드 디스크를 받기도 했다. 이로써 제플린은 1969년 한해에 2매의 앨범을 선보이며 불과 1년만에 정상에 오르는 대기록을 수립한 셈이 되었다. 비틀즈로부터의 바톤터치는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 여세를 몰아 이듬해 9월에는 'Immigrant Song'과 'Since I've Been Loving You'가 수록된 'Led Zeppelin III'가 발표되었다. 'Immigrant Song'에서 그들은 도발적인 기타 사운드에 마성적인 보컬로 공격적인 이미지를 보여주었고, 'Since I've Been Loving You'에서는 마구 쏟아내는 듯한 날카로운 보컬에 블루스적인 필까지 보여주었다. 특히 'Immigrant Song'은 하드록의 양식을 확립한 곡이라고도 불리우며, 'Stairway To Heaven'과 함께 많은 이들이 꼽는 그들의 대표곡이기도 하다. 이 3집 앨범 역시 발매 1개월만에 1위('70.10)에 오르는 위업을 달성해냈으며, 이로써 그들은 하드록밴드로서의 안정적인 발판을 확고하게 다지기 시작한다.
   그들의 불후의 명작인 'Stairway To Heaven'이 담겨진 네번째 앨범이, 아무런 앨범 타이틀도 없이 발표된 것은 그로부터 1년후인 71년 11월이었다. 그때까지 상업적인 성공과는 별도로 매스컴에서의 평가가 좋지 않던 그들이었지만 이 앨범으로 그들은 음악적인 평가까지 아울러 받게 된다. 'Black Dog', 'Rock And Roll', 'Misty Mountain Hop'도 록 역사에 길이 남을 명곡이지만, 'Stairway To Heaven'은 말 그대로 조각적이라 할 정도로 치밀하고 아름다운 구성을 지닌 대곡이었다.
   이 곡은 당시 지미 페이지가 심취해있던 흑마술의 알레이스타 크로울리의 철학과, 로버트 플랜트의 고대 켈트 역사관 등이 반영되어 지극히 신비주의적인 색채를 띄었다. 이런 색채는 이미 'Immigrant Song'부터 나타났던 것이라 할지라도, 여기서 그들의 음악은 더 이상 사회와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게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이러한 가사의 마력은 그들의 추종자들에게 엄청난 것이었고, 미국밴드의 유치한 노랫말에 비해서는 차라리 고급스러워 보이기도 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사회적 충격이라는 록의 미학과는 거리가 먼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곡에서 지미 페이지의 기타만은 정말로 뛰어난 것이었고, 이후로도 전통적인 주법에 충실하면서 여러 장르를 리프화시키며 어쿠스틱 기타에도 많은 관심을 가진 페이지의 기타는 록기타의 커다란 지침이 되었다.
   73년 3월에 발표한 5집 'Houses Of The Holy'는 그동안 일련번호를 붙여오던 앨범 타이틀에서 벗어나 최초로 제명을 달았던 앨범이었다. 여기서 그들은 쫄깃쫄깃한 펑크를 처음으로 갖고 들어왔다. 이후 트레드, 민속음악 등 각양각색의 음악적 요소를 융합시킨 그들의 잡식적 창작력이 이 앨범에서 그 시작을 보인 것이다. 다양한 악기의 사용, 시대를 앞서가는 녹음기술도 그렇지만, 이처럼 편식하지 않는 다양한 장르에 대한 높은 이해야말로 그들이 비틀즈의 대를 잇는 그룹임을 증거하는 요소임에 분명한 것처럼 보였다.
   이무렵 레드 제플린은 뉴욕의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록 음악사에 길이 남을 환상적인 스테이지를 펼쳤다(약 18만 달러에 달하는 이 공연의 수익금 전액은 도난당했다). 이후 플로리다의 템퍼에서 개최된 대규모 콘서트에는 무려 5만 6천여의 인파가 운집하여 불과 하루저녁에 31만8천 달러라는 믿기지 않을 액수의 수익을 올렸다. 이처럼 그들은 거의 최초의 대형 스타디움 록밴드였지만, 이는 그들이 청중과 호흡하기 보다는 청중 위에 군림하는 음악을 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이는 이들의 거대한 위상을 감안하면 불가피한 점이기도 했겠지만, 그들은 더 이상 록음악의 소박하고 촌스러운 멋을 간직한 밴드가 아니었다.
   73년 한해를 공연여행으로 보낸 레드 제플린은 74년을 새로운 작품구상 및 휴식으로 보내며 그동안 전속되어 있던 어틀랜틱사에서 독립하여, 레드 제플린의 음반사인 '스완 송'(Swan Song)을 설립하게 된다. 그리하여, 75년 2월에 스완 송 레이블에서 발표한 최초의 앨범이자, 레드 제플린 최초의 더블 앨범인 6집 'Physical Graffitti'를 선보인다. 이 음반은 인도계 혼혈인 로버트의 아내 모린의 안내로 인도에서 휴가를 즐기면서 구상한 곡을 중심으로 꾸며졌으 며, 인도풍의 'Kashmir'와 니힐리즘의 극치를 연출해 내는 'In My Time Of Dying' 등이 수록되었다.
   그로부터 1년후인 76년 3월엔 최후의 걸작앨범이라 불리우는 7집 'Presence'가 발표되었다. 여기서 이들은 지미의 모든 것을 보여 주는 'Tea For one'과 함께 더욱 원숙해진 면모를 과시했다. 8개월 후인 같은해 11월엔 3년전에 도난사건으로 유명했던 메디슨 스퀘어 가든 콘서트의 하일라이트에 멤버들의 실루엣을 곁들인 세미 다큐멘터리 영화 "The Song Remains The Same"이 공개되면서, 아울러 더블 사운드트랙이 통산 8집으로 선보였다.
   레드 제플린의 명성이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휴가를 즐기던 로버트가 부인 모린과 함께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하여 중상을 입어, 레드 제플린의 모든 일정은 이듬해인 77년 4월까지 연기되었다. 그러나 전미순회공연을 돌던 얼마 뒤, 이번에는 로버트의 어린 아들이 급성 바이러스 질환으로 목숨을 잃는 비극적인 사건에 직면하게 된다. 이 일로 로버트는 물론, 레드 제플린 전체가 충격과 슬픔에 휩싸여 남은 공연 일정은 전면 취소되고 말았다.
   그 뒤 레드 제플린은 2년동안을 침묵하게 되고, 주위에선 레드 제플린의 해산설을 끊임없이 떠들어 댔다. 그러나 이러한 낭설을 일축하듯 레드 제플린은 79년 9월 9집 'In Through The Out Door'로 화려하게 재기했다. 'In The Evening'을 비롯하여 'Fool In The Rain'과 'All My Love', 그리고 처절하기 이를데 없는 'I'm Gonna Crawl' 등으로 점철된 9집은 미국에서만 4백만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앨범차트 1위에 안착했지만, 그 음악적 평가는 엇갈리는 것이었다.
   결국 1980년 9월 25일 금세기 최고의 록 드러머였던 존 보냄이 죽게 되면서 레드 제플린은 그 비행의 나래를 접게 된다. 그해 10월 16일부터 개시될 월드 투어를 앞두고 지미의 집에서 리허설을 하던 존 보냄이 33세의 나이에 이유를 알 수 없는 급성 알콜중독으로 죽어버린 것이었다. 기자들은 레드 제플린의 후임 드러머에 대한 기사를 연일 보도했으나, 지미는 존의 장례식을 마친후, "그것은 고인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우린 존을 위해 제플린을 해체하겠다"는 인터뷰로 레드 제플린의 활동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들이 보여준 이러한 우정은 대단한 미담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로써 록의 전성기는 사실상 그 끝장을 본 것이었다. 마침 이 무렵에는 존 레논도 그 유명을 달리하고 있었으니, 록계로서는 불운이 겹친 셈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음악은 지금도 라디오 신청곡 목록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들의 음악을 최고로 생각하는 골수팬들이 영미는 물론이고 우리나라에도 다수 존재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이런 점에서 보았을 때, 그들이 최고의 실력을 갖춘 초대형 록밴드로서, 딥 퍼플과 함께 70년대를 풍미했고 지금도 록계에 많은 영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틀림 없는 것으로 보여진다.
 

::::  예술성에 몰두한 70년대 록의 표상  ::::

"우리는 우리가 최고 밴드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다만 2등인 그룹보다는 나은 그룹이라고 생각한다"
   로버트 플랜트(Robert Plant)는 지난 75년 록 평론가 리자 로빈슨에게 자신의 그룹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의 겸손한 자부처럼 제플린은 대중 음악 역사상 명백한 베스트 록 그룹 중 하나로 손꼽힌다. 예나 지금이나 그들의 명성이나 실력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 최고 그룹의 주자인 로버트 플랜트와 지미 페이지(Jimmy Page)가 조우하여 얼마 전 <언레디드><Unledded>라는 언플러그드 음반을 발표, 다시금 화제를 모으고 있다. 두 사람의 만남을 기획한 MTV사가 '가장 환상적인 구상'으로 간주, 2년여에 걸쳐 총력을 기울여 작업을 추진한 것만 봐도, 실로 제플린이 얼마나 위대했던가를 능히 알 수가 있다.
   그러나 플랜트가 자랑하는 제플린의 위대함은 부인하기 어려운 뚜렷한 한계를 지닌다. 그 찬란한 명성은 70년대와 록 문화에만 국한된다는 사실이다. 록 비평가 짐 밀러는 "그들 베스트 음악의 위력과 대중적 어필의 영구성에도 불구하고 제플린은 록 문화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의 주장처럼 제플린의 '강한'록은 비틀스의 섬세함, 밥 딜런의 철학적 깊이, 롤링 스톤스의 자유분방함에 길들여진 기성세대에게는 폭넓게 어필하지 못했다. 그들의 응원군은 어디까지나 록 대중이었고 록 매니아였다.
   하지만 록 무대로 범주를 좁히더라도 그들이 받은 평점은 만점이 아니었다. 록은 본질적으로 50년대 중반에 태동된 이래 기존과 기성을 거부하는 저항성과 폭발성이라는 특성을 지녀왔다. 헤비메탈의 형식미를 완성시키는 등 외형에 있어서 제플린의 파괴력은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지만 그들에게서 시대와 사회에 의문을 던지는 메시지 측면의 '록 윤리'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이 때문에 그들의 록은 예술적 충격일지는 몰라도 록 특유의 '사회적 충격'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물론 그들에게도 모든 로큰롤의 심장부에 도사라는 도피, 탈출과 같은 '어두운 정신'의 발산은 있다. 오히려 찬란한 천재적 역량으로 그것을 세련되게 표현했다. 그러나 그들은 록 대중의 귀를 한 차원 끌어올렸을 뿐이지 록 스타로서의 지도력은 행사하지 못했고 또 그러한 시도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60년대 말 최후의 히피 밴드로 규정되는 그룹치고는 선뜻 이해할 수 없는 부조화된 행보였다.
   그들은 실로 '록의 사회성'에 헌신한 미국의 사이키델릭 록 그룹과 달리 크림(Cream)처럼 록예술의 진수만을 탐구하는 데 열중한, 지극히 '영국적인' 그룹이었다. 이것은 급기야 이후 영국의 후배 뮤지션들에게 반격의 빌미를 제공하는 치명적 약점이 되고야 만다.
   어쨌든 지미 페이지의 풍부한 전통 기타 주법, 로버트 플랜트의 가장 헤비메탈적인 보컬, 존 보냄(John Bonham)의 가공할 해머 드러밍, 존 폴 존스(John Paul Jones)의 능란한 베이스라는 특별한 결합으로 제플린은 70년대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명성을 쌓았다. 인기가 절정에 오른 75년에는 그들이 발표한 앨범 6장 모두 빌보드 앨범 차트에 오르는(록 최초) 경이적 기록을 낳았고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의 3차례 공연 티켓이 4시간만에 완전 매진되는 광풍이 야기되었다. 심지어 당시 제럴드 포트의 백악관에서도 그들의 명곡 '천국으로 가는 계단''Stairway to heaven'이 울려 퍼졌으며 포드 대통령의 딸들이 TV <딕카벳소>에 출연, 레드 제플린을 가장 좋아하는 그룹이라고 털어놔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기도 했다(페이지는 이에 대해 "그들이 심미안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폭발적 흡인력은 아름다움을 식별하는 안목이 없더라도 금방 포착되는 놀라운 '예술적 사운드'에 기초한다. 디스토션을 주무기로 하는 지미 페이지의 다채롭고 명암이 섞인 기타 플레이는 세련되기 그지없었다. 프로듀서인 그의 관심은 언제나 사운드의 질감에 쏠려 있었다. 그의 소리의 응집력을 높이기 위해 리버브(reverb)와 에코(echo)를 사용했고 항상 베이스 드럼과 같은 저음에 치중해 기능주의를 위한 스튜디오 뮤지션 솜씨의 정점(頂點)을 제시했다. 거기에 마치 그림과 같은 로버트 플랜트의 하이톤 보컬이 더해져 있었으니 어떤 경쟁자도 그 정교한 헤비 사운드의 전형 앞에 무릎꿇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장르에 대한 식욕 또한 놀라웠다. 그들은 헤비메탈과 블루스가 혼합된 '헤비블루스'만 한 것이 아니었다. '크런지''The crunge'라는 곡에서 '펑크(Funk)'를 결합시킨 것을 비롯해 로커 빌리'Condy store rock', 레게'D'yer Make'r', 살사'Fool in the rain', 포크'Going to California', 컨트리'Down by the seaside' 등 존재하는 모든 대중 음악 장르에 손을 댔다. 심지어 모로코풍 음악'Kashmir', 인디언 리듬'Black mountain side'도 시도했다. <서커스>지는 지난해 "제플린을 역사상 가장 중요한 하드록 그룹으로 떠올려 준 것은 단지 그들의 초강력 해머링이 아니라 장르에 있어서 그들이 발휘한 광대한 영향력"이라고 그들의 가치를 평했다. 68년 지미 페이지가 야드버즈(Yardbirds)의 잔재를 모아 결성한 제플린의 그러한 '거시적'음악 접근을 토대로 70년대 초반 비틀스, 사이먼 앤드 가펑클(Simon & Garfunkel),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가 사라져 공허함을 느끼는 팬들의 텅빈 가슴을 파고드는 데 성공, 일약 록 청춘의 우상으로 떠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제플린의 음악은 앞서 지적한 대로 예술지상주의로 치우치면서 서서히 문제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또한 그들은 너무 많은 돈을 벌었다. 이 두 가지 측면을 겨냥, 70년대 말 영국의 젊은 록 그룹과 팬들은 강한 분노를 터뜨렸다. <버진 록 백과사전>에는 "제플린은 77년까지 중단 없는 상업적 성공을 구가했지만 이후 젊은 세대로부터 '공룡화된 록의 오만한 종사자'의 대표적 사례로 비판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젊은 세대한 바로 섹스 피스톨스(Sex Pistols), 클래시 (Clash), 댐드(Damned)가 지휘한 펑크(punk)진영이었다. 이들은 "기업화된 록의 풍토에서 배부른 제플린은 더 이상 고통받는 청년들의 심정을 대변할 자격이 없다"고 맹렬히 성토했다. 펑크 그룹들은 또 록 음악은 기본적인 세 코드만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점을 신뢰한 집단이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악기 연주에 훈련되지 않았어도 누구나 무대에 올라 연주할 수 있고 노래부를 수 있다는 것을 록의 원초적 본능이라고 여겼다. 논란의 여지를 남기긴 하지만 이러한 록의 원시성과 거친 생기(生氣)에 대한 신봉은 바로 사운드 부문에 있어 최고의 기량을 과시한 제플린을 겨냥한 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제플린은 그러나 후배들의 공세를 전혀 거들떠보지 않았다. 플랜트의 5살 짜리 아들이 급성 바이러스 질환으로 죽는 바람에 공연 일정이 전면 취소된 후 발표한 79년의 재기 앨범 <인 스루 디 아웃 도어><In Through The Out Door>는 존 폴 존스의 신시사이저 편곡이 짙게 깔렸고 제플린답지 않은 '팝적인 필'이 넘실댔다. 원시로의 회귀는커녕 도리어 과학적 접근을 강화한 것이었다. 전작들과의 부조화가 두드러진 이 앨범은 비평가들로부터 그들 앨범들 가운데 가장 허약하다는 핀잔을 받았다. 록 평자들은 애초부터 그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롤링 스톤>지는 다섯 차례나 제플린의 앨범들에 노골적으로 부정적인 평을 가했다. 페이지의 유명한 매스컴 기피증을 록계 일각에서는 록 전문지들의 악평이 남긴 상처에서 비롯된 것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그들은 참으로 '70년대적'이었다. 이상주의의 60년대 그룹도, 탐욕의 80년대 스타들도 아닌 그들의 이미지는 '자극과 개인주의'로 점철된 70년대 정서와 정확히 맞물렸다. 짓궂은 장난이 트레이드마크였고, 일례로 그들의 호텔방 부수기는 아주 유명한 것이었다. 심지어 어느 호텔은 아예 그들에게 수리해야 할 방을 내줄 정도였다. <빌보드>지는 그들의 '파괴적'이라고 했고 영국의 <선>지는 '난폭하다'고 지적했다.
   여자를 몰고다닌 플랜트는 마음에 드는 여자면 필사적으로 접근해 달콤한 언어들을 늘어놓는, 천재적 수완을 가진 플레이보이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초자연적인 신비와 심령 현상에 남다른 관심을 쏟았으며 악마주의자 알레이스터 크로울리 집에서 한동안 머무르기도 했다. 가능한 한 노출을 꺼린 페이지는 샤롯트라는 여인과 결혼했지만 끝까지 사생활 공개를 차단할 만큼 숨김으로 일관했다.
   이는 자극과 개인주의가 어우러진 전형적인 70년대식 절충의 정서였다. 대서사시 <천국으로 가는 계단>이 말해주듯 한 곡 안에서, 또 앨범 전체에서도 그들의 서정성과 격정을 절표하게 공존시켰다. 덧붙여 페이지의 언론 혐오증을 개인주의적 도피라 한다면 유난히 보드카를 밝힌 보냄이 80년 9월, 12일간 내리 술 마신 뒤 리허설 도중 쓰려져 사망한 것은 자극의 측면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제플린에게 참으로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보냄의 사망 후 페이지가 고인에 대한 도리가 아니라며 멤버 충원을 마다하고 그룹의 해산을 선언한 '숭고한 우정'이었다. 그들은 수시로 멤버가 바뀐 경쟁자 딥 퍼플(Deep Purple)과 달리 멤버들 간에 특별한 반목 없이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것은 공동체 정신을 또다른 성격으로 하는 록의 스타일로 볼 때 매우 흐뭇한 광경이었다. 플랜트와 페이지의 최근 결합이 눈길을 끄는 것도 그러한 감동이 주는 향수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록의 영원한 전설로 추앙되어야 할 이유는 많다. 그들은 가능한 한 싱글 발표를 꺼리고 앨범 전체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심혈을 쏟아 음반제작 풍토를 일신했고, 페이지에 해당되는 것이지만 선례 없는 작품에 대한 통제력을 행사, 어느 그룹보다 예술적 동기가 완벽하게 실현되는 확립, 그리고 그룹 전체에 의한 헤비메탈 형식의 완성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그 전설의 한편에는 아픈 구석이 도사리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에 대한 평가는 시대적인 환경의 변화에 따라 나름대로 부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실로 제플린은 록의 진정한 면모가 과연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반추케 하는 전형적인 그룹이다.

Stairway to Heaven

 

Rock and Ro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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